역사 고비마다 신앙중심 지키며 진리 사수
대구지역 두 번째 교회로 설립, 107년간 위대한 신앙지도자 배출 거대한 영향력 끼쳐

“망국의 비통, 일제 야만의 횡포, 8·15해방 후의 혼란, 민주·공산의 분쟁, 보수주의·자유주의의 다툼, 친일파와의 갈등, 그리고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이단사설 사이비 신앙운동 등 이 모든 혼란과 암울함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자세로 지금까지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이성헌 원로목사가 1세기를 넘어 7년을 더한 시점에서 회상하는 대구서문교회(이상민 목사) 역사는 이처럼 민족의 질고와 진리의 파수로 점철된 여정이었다. 그리고 굵직한 역사적·신학적 사건마다 대구서문교회의 위대한 신앙지도자들이 중심을 지키며 지역복음화는 물론 교단과 한국교회에 적잖은 영향력을 끼쳐왔다. 그러기에 총회역사사적지 지정을 앞둔 대구서문교회 107년의 역사와 가치는 역대 담임목사의 여정과 일맥상통한다고 보면 된다.

안의와 선교사-대구서문교회 설립

제임스 E. 아담스(한국명 안의와) 선교사는 대구서문교회 설립자 이전에 대구 복음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첫 선교사이다. 1897년 11월 1일 안의와 선교사는 아내 넬리 딕과 두 아들, 그리고 당시 어학선생인 김재수와 함께 대구에 부임했다. 그는 대구·경북 최초 교회인 남문안교회(현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하는 등 수많은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대구서문교회는 1912년 5월 20일 설립예배를 드림으로써, 대구에서는 두 번째 교회가 되었다. 당시 대구읍교회(현 대구제일교회)와 멀지 않은 거리에 대구서문교회를 세운 것은 원거리 신자들의 편의와 대구읍교회의 폭발적 성장 때문이었다. 해방이 되기까지 대구서문교회는 대구읍성 서편에 있다하여 서편교회라 할 정도로 많은 이름으로 불렸다. 서편교회 동산교회 제2교회 서문교회 달남교회 신정교회 등이 그것이다. 해방 이후 1947년 명신홍 목사가 위임식을 할 때 공식적으로 ‘서문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도록 결의했다.
 
정재순 목사-시대의 아픔, 신앙으로 보듬다

정재순 목사는 1915년부터 1922년까지 서문교회를 담임하다가 복음전도와 교회설립 열정으로 사임했다. 그리고 1938년 다시금 부임해 1946년까지 서문교회를 이끈 두 번째 목회자였다.

정 목사는 교사로 근무하며 후진양성에 전력하는 동시에 방혜법 선교사(H. E. Blair)의 조사로 있으면서 대구·경북 전역의 전도사역을 했다.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정재순 목사는 그해 5월에 서문교회 동사목사로 위임받아 시무했다. 정 목사 부임 이후 서문교회는 예배당 증축, 교인 500명에 이르는 등 크게 성장했다.

107년 역사의 대구서문교회가 총회역사사적지 지정을 앞두고 있다. 대구서문교회는 민족과 한국교회 질고의 역사마다 진리 사수와 함께 아낌없는 섬김으로 시대적 사명을 다한 교회였다. 사진은 대구서문교회 설립 50주년 기념 행사.
107년 역사의 대구서문교회가 총회역사사적지 지정을 앞두고 있다. 대구서문교회는 민족과 한국교회 질고의 역사마다 진리 사수와 함께 아낌없는 섬김으로 시대적 사명을 다한 교회였다. 사진은 대구서문교회 설립 50주년 기념 행사.

이런 가운데 1919년 3월 8일 대구의 독립만세운동에 정재순 목사가 선봉에 섰다가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20년 6월 정재순 목사를 비롯한 출옥성도들이 돌아온 이후 교회 발전에 가속도를 더했다. 성도가 늘어나 증축으로는 한계가 있어 새로운 예배당 건축을 준비할 정도였다. 또한 남녀좌석을 구분했던 휘장을 없애 당시 사회 환경에서 획기적 이끌었다. 아울러 예배당에 의자를 설치했고, 여성 사역자도 세우는 등 근대화에도 앞장서는 교회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가운데 정재순 목사는 1922년 1월 개인의 안위를 뒤로 하고 경북 안동 일대 복음전도 사역을 위해 사임했다가, 1936년 11월 17일 대구서문교회 후임이었던 염봉남 목사 별세 이후 성도들의 요청으로 1938년 다시금 서문교회에 부임했다. 재부임 당시는 일제의 강력한 교회탄압이 있던 시기였다. 정 목사는 자신이 교회를 지키지 않으면 교회가 폐쇄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조국 해방을 위해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성도들을 돌봤다.

정재순 목사와 21년을 함께한 서문교회는 민족의 암흑 시기에 기독교 신앙을 애국애족 정신으로 승화시켜 조국 독립을 향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근대화에 앞장서는 등 시대의 아픔을 보듬는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염봉남 목사-대표성 있는 교회로 자리매김하다

대구 초창기 목회자들(맨 오른쪽이 정재순 목사).
대구 초창기 목회자들(맨 오른쪽이 정재순 목사).

염봉남 목사는 1922년 6월 21일 부임해 1936년 11월 17일 소천하기까지 14년간 서문교회에서 시무했다. 염 목사 재직 동안 서문교회는 크게 부흥했다. 부임 당시 교세가 400명 수준이었으나 1933년에는 1988명으로 양적 성장을 이뤘다. 이 기간 제2예배당을 신축했고, 대신교회를 분립했으며, 창립 25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갖기도 했다.

그는 교남기독교청년회 회장, 희도보통학교 이사장, 평양신학교 이사, 숭실전문학교 이사, 동산병원 이사 등을 지내며 교계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1928년에는 제17대 총회장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1936년 당시 서문교회 출신 목사는 총 12명이었고, 평양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는 학생들도 다수였다. 이처럼 염봉남 목사 시절 서문교회는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은 교회에서, 이제는 복음을 전해주는 교회로 성장했다. 고난 속에서도 신앙과 애국의 처소로 서문교회는 든든히 서가고 있었던 것이다.

명신홍 목사-전쟁 아픔과 교단신학 보듬는 큰 교회되다

WCC 문제로 큰 내홍을 겪던 모습.
WCC 문제로 큰 내홍을 겪던 모습.

1946년부터 1957년까지의 서문교회는 제38대 총회장이었던 명신홍 목사가 담임하던 시기였다. 아울러 이 시기는 해방과 한국전쟁, 교단 분립 등 민족사적·교회사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은 서문교회 중등부가 처음으로 조직된 날이었고, 명신홍 목사는 하기수양으로 서울에 출타 중이었다. 전쟁 발발 이후 공산군의 탄압으로 인해 대구의 선교사들이 목사들을 제주도로 피난시켰다. 이로 인해 불과 4개월 전에 부임했던 이성헌 전도사가 명 목사 자리를 대신해야 했다.

전쟁통에 서문교회에는 1500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찾아왔다. 온종일 기도회가 이어졌고, 주일에는 주일학생 2000명을 포함해 무려 4000여 명이 몰려들었다. 1951년에는 총회신학교가 서문교회에서 개교해 계성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1년간 장소를 제공했다. 전쟁으로 또다시 아픔을 겪은 민족 앞에서 서문교회는 지역민들과 피난민들의 영육간 안식처요, 개혁신학의 요람인 총회신학교를 든든히 지켜준 울타리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고려파 분립 당시 서문교회 내부에서도 고신측 지지자 일부가 교회를 이탈해, 분열 역사가 없던 서문교회에 아픈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1952년 설립 40주년을 맞을 당시 서문교회는 대구는 물론 전국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진 교회가 되었다. 명신홍 목사는 한국교회 미래를 위한 목회자 양성이라는 부름에 1956년 8월 서문교회를 사임했다.

이성헌 목사-보수신앙 파수 선봉에 서다

오토바이를 타고 전도하는 대구서문교회 설립자 안의와 선교사.
오토바이를 타고 전도하는 대구서문교회 설립자 안의와 선교사.

이성헌 목사는 1950년 2월 12일 26세 나이로 서문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부임 넉달 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명신홍 담임목사를 대신해 피난민 사역과 설교사역을 감당했다. 전도사 신분으로 새벽과 저녁집회를 인도했다. 한국전쟁 이후 이성헌 전도사는 서문교회에서 임시목사 부목사를 거쳤고, 1957년 10월 6일에는 서문교회 위임목사가 됐다.

곧이어 한국교회는 WCC 문제로 장로교 분열이라는 최대 고비를 맞았다. 1959년 10월 서문교회 내에서도 WCC 가입 문제로 분쟁이 시작됐다. 당시 이성헌 목사는 미루어 왔던 유학을 미국에서 하던 중이었다. 한번 시작된 교회분쟁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급기야 성도들의 ‘목자없는 양’과 같다는 전갈을 받은 이 목사는 그토록 바라던 유학을 접고, 1960년 4월 1일 가족조차 모르게 귀국했다.

당시 대구·경북 일대 많은 교회들이 서문교회를 주시했다. 보수신학 파수의 기준점이 바로 서문교회였기 때문이었다. 온갖 시련에도 보수신학을 사수한 서문교회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WCC로 넘어가지 않고 잔류했다. 이 건으로 서문교회가 영남지역의 영적 기준점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 다시금 증명되었다. 서문교회에서 45년간 담임한 이성헌 목사는 교회 영적 부흥은 물론 1988년 제73대 총회장으로 교단 발전과 한국교회 연합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이상민 목사-관록의 100년, 섬김으로 교회 사명 감당하다

대구서문교회는 염봉남 목사와 명신홍 목사를 뒤이어 이성헌 목사가 총회장에 선출되며 교단 발전과 한국교회 연합과 부흥에 지도적 역할을 감당해 온 관록있는 교회로 자리매김했다.
1995년 이상민 목사 부임 이후 서문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이웃에게 행복을’이란 가치를 꾸준하게 실천하고 있다. 지역 최초 장애인 주일학교 신설, IMF 시절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 실시, 사회복지재단 설립, 성매매 피해여성을 위한 수가선교, 수감자들을 위한 담안선교, 시랑의 김장나누기 등 무수한 섬김 사역으로 지역민들을 돌보고 있다.

107년의 역사를 쓰고 있는 대구서문교회의 향후 100년이 교회사적으로, 나아가 민족사에서 어떤 모습으로 쓰임받을 것인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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