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사적지 지정을 앞둔 교회들] ⑯ 완주 동상면의 세 교회
[역사기획/ 사적지 지정을 앞둔 교회들] ⑯ 완주 동상면의 세 교회
  • 정재영 기자
  • 승인 2019.07.16 15: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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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 공유한 형제교회들, 믿음 열매 ‘풍성’

같은 설립자에 전쟁과 수몰 아픔 함께 겪어 … 순교신앙 자긍심 지키며 생명의 길 개척

곶감하면 경상도 사람들은 상주를 떠올리고, 전라도 사람들은 완주를 떠올린다. 완주에서도 동상면의 곶감 품질은 최고로 친다. 깊고 높은 산악지대에서 잘 자란 단감을 적당한 식감으로 말린 그 맛은 무엇에도 양보하기 힘들다.

이 산악지대에서는 곶감만 익어간 것이 아니다. 일찍 들어간 복음이 순박한 산골 사람들의 심성에 스며들며,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들로 익어갔다. 학동교회(이석윤 목사) 수만교회(이현규 목사) 신월교회(김대식 목사)는 그 열매들을 주렁주렁 맺은 신앙공동체들이다.

한국전쟁 당시 핍박과 순교의 시련을 함께 겪은 완주군 동상면의 세 교회 전경. 왼쪽부터 학동교회 수만교회 신월교회 예배당.
한국전쟁 당시 핍박과 순교의 시련을 함께 겪은 완주군 동상면의 세 교회 전경. 왼쪽부터 학동교회 수만교회 신월교회 예배당.

세 교회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같은 동상면 관내, 차량으로 10분 이내에 왕래가 가능한 거리에 있는 것부터가 그렇다. 무엇보다 같은 설립자, 전쟁과 수몰의 아픔을 함께 겪은 역사가 세 교회를 단단한 삼겹줄로 묶어왔다.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 미국남장로교선교부 소속 맥커친(한국명 마로덕) 선교사가 전주에서 말을 타고 위봉산성을 넘어와 위봉교회를 세운 것이 인근 동상면에까지 복음이 들어오는 계기가 됐다.

위봉마을에서 가까운 학동마을에서 전도를 받은 주민들이 위봉교회로 출석하여 신앙생활을 하다 1905년 자신들 동네에 학동교회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인생의 해답을 발견한 이들은 뜨거운 전도열정으로 이웃마을에 복음을 퍼뜨렸다. 그 결과 이듬해인 1906년에는 단지동교회(현 수만교회)가, 그 다음해인 1907년에는 만재교회(현 신월교회)가 설립됐다.

초창기에는 선교사를 도와 멀리 원암교회에서 찾아온 정창신 조사가 세 교회를 돌아다니며 성도들을 돌보았고, 나중에는 김성호 장로가 전임 전도사가 되어 교회들을 이끌었다. 장경문 장로(학동교회) 이공일 김희만 장로(수만교회) 김창규 장로(신월교회) 등 신실한 리더들도 세워졌다. 특히 학동교회의 경우는 마을 전체가 예수 믿는 사람들로 가득 찰만큼 크게 부흥했다.

1999년 신월리에 건립된 순교기념비. 동상면을 비롯한 완주군 일대 순교자 20여 명을 함께 기리는 이 기념비는 인근 야산에 세워져 있다가 현재는 신월교회 앞마당으로 옮겨졌다.
1999년 신월리에 건립된 순교기념비. 동상면을 비롯한 완주군 일대 순교자 20여 명을 함께 기리는 이 기념비는 인근 야산에 세워져 있다가 현재는 신월교회 앞마당으로 옮겨졌다.

교인들은 문맹퇴치에 앞장섰고, 구제와 봉사에도 힘썼다. 전국 7대 오지 중 하나로 꼽히던 이 지역에 교회들이 우뚝 서고, 남부럽지 않은 교육수준을 자랑하게 된 데는 이들의 헌신적인 공로가 컸다.

언제까지나 평안할 것 같던 이 지역에 암운이 드리운 것은 그토록 고대하던 해방 직후였다. 좌우의 이념대립은 이 산골마을에까지 혼돈을 몰아왔다. 강력한 좌익세력이 일대에 형성되었다. 하지만 교회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상면의 좌익 우두머리가 붙잡혀 처형을 당하게 되었을 때도, 앞장서 구명에 나선 것은 신월교회 박용순 집사 등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에게 베푼 온정이 무자비한 탄압으로 돌아왔다. 수만교회 예배당은 불에 타 전소되었고, 교인들에게는 매일처럼 억지로 사상교육이 이루어졌다.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혹독한 박해가 뒤따랐다.

평소 같으면 흥겨운 잔치 분위기가 물씬했을 1950년의 추석은 이 산골을 비명과 통곡으로 채웠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궁지에 몰린 인민군과 좌익세력들이 퇴각하는 길에 교회 지도자들과 우익인사 50여 명을 끌고 동상면 분주소 인근 야산으로 끌고 갔다.

기적적으로 살아온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총에 맞아, 돌에 맞아, 칼에 맞아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단지동교회 김성원 목사를 비롯한 12명의 성도들이 그렇게 한 날 한 시 순교의 길을 걸었다. 이들을 구명하고자 애쓰던 박복수 씨마저 함께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죽음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무주 출신의 김성원 목사는 마로덕 선교사와 함께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서다 고초를 당했던 인물이다. 어려운 산골마을로 들어와 목회에 정진하며 계속해서 신앙의 지조를 지키다, 수만리 이장이자 같은 교회에서 재정을 담당하던 김영옥 집사와 함께 절명했다.

금산 출신의 박용순 집사는 아이들을 유난히 아꼈다. 고향의 경당리교회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다, 교사로 발령을 받아 동상으로 이주해 와서도 교회에서나 학교에서나 아이들 보살피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손수 일대의 산골 아이들에게 천연두 예방접종을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만재교회에서 장로 피택을 받고 장립을 기다리던 중 발발한 전쟁으로, 그는 아내 최선순 집사와 나란히 순교의 제물이 됐다. 같은 교회에서 동고동락했던 김태환 집사, 전도하고 교회 세우는 일에 앞장섰던 김성녀 집사, 김명화 집사 등도 이 부부와 같은 길을 걸었다.

한 집안 사촌 간으로 학동교회 장경문 초대장로의 대를 이어 열심히 섬기며, 학동을 예수마을로 가꾸었던 장순 장종석 장장수 집사 등은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과 우애를 함께 했다. 장순예 전도부인, 주일학교 교장을 맡았던 이주선 집사도 이들 형제처럼 순교자 반열에 올랐다.

이들 모두는 총회순교자 명부에 이름을 올렸으며, 2007년 총회순교자기념사업부가 발간한 <순교행전-죽으면 사는 은혜>에는 이들의 순교사적이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1999년에는 이들을 비롯해 완주군 일대의 교회 순교자 20여 명을 기리는 순교기념비가 신월마을에 건립되기도 했다.

이처럼 교회의 주축을 잃고 어려움을 겪던 교회들 앞에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학살사건과 서울 수복 이후에도 동상면 일대는 빨치산의 거점지역으로 남아 오랫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이 되었다.

게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동상저수지 조성으로 상당수 마을이 수몰되면서 단지동교회와 마재교회는 터전을 잃고 말았다. 순교자들이 최후를 맞이한 아프고도 영광스러운 기억의 현장도 함께 물에 잠기고 말았다. 하지만 그 어떤 역경도 세 교회의 복음행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새로 정착한 마을에서 교회의 이름을 바꾸어가면서도, 기나긴 역사와 순교사적을 간직한 공동체로서의 자긍심과 정체성만큼은 변함없이 지켰다. 순교자의 후손들 역시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교회의 새로운 주역들로 성장했다. 학동교회만 해도 9명 이상의 목회자와 15명 이상의 장로들이 배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전주노회(노회장:공인식 목사)는 제104회 총회에 이들 세 교회를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로 지정해 줄 것을 청원하는 헌의안을 제출한다.

삶과 죽음을 함께 하며 선배들이 걸었던 고난의 길, 이제는 그 후예들이 이어 걸으며 학동교회 수만교회 신월교회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생명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동상면 세 교회가 순교사적 기리는 방법]

순교기념비는 강한 연대의 끈
후예들 힘 합쳐 건립 … 교회 차원 추모식도

순교자들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째 되는 해인 1999년 6월 신월마을에 세워진 순교기념비는 학동교회 수만교회 신월교회 등 완주군 동상면의 세 교회들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끈이다. 순교자의 후예들인 이범로 집사와 오정식 유재신 장로 등이 힘을 합해 건립한 이 기념비는 몇 차례의 위치변경 끝에 현재는 신월교회 예배당 곁으로 정착했다.

완주군 동상면의 순교사적을 공유하는 세 교회의 목회자들. 사진 왼쪽부터 학동교회 이석윤 목사, 신월교회 김대식 목사, 수만교회 이현규 목사, 마지막은 북전주노회장 공인식 목사.
완주군 동상면의 순교사적을 공유하는 세 교회의 목회자들. 사진 왼쪽부터 학동교회 이석윤 목사, 신월교회 김대식 목사, 수만교회 이현규 목사, 마지막은 북전주노회장 공인식 목사.

기념비에는 동상면 뿐 아니라 봉동의 제내교회 서두교회 봉상교회와 삼례 후정교회 등 완주군 전체의 한국전쟁 당시 순교자들의 명단을 함께 새겨놓으며, 이들을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두었다.

당시 순교기념비 건립과 함께, 신월교회 순교자 박용순 집사의 아들 박상락 장로가 쓴 <아직도 마르지 않는 눈물>(신앙생활사)이라는 제목의 실록이 발간돼 세 교회의 순교사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신월교회 김대식 목사는 “마재교회에서 신월교회로 이름이 바뀌게 된 배경에는 수몰 이후 교회당 위치가 바뀐 부분도 있지만, ‘마재’라는 말의 어감에서 당시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끔찍한 단어가 연상된다는 이유도 작용했다고 한다”면서 “그만큼 순교사건은 유족들은 물론이고 남은 교인들에게까지 두고두고 트라우마로 남았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학동교회 이석윤 목사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학동교회는 5년 전부터 매년 추석을 즈음하여 순교자기념주일을 지킨다. 당초 순교자 유족들이 개별적으로 추모식을 열던 것을 교회 공식행사로 확대한 것이다.

“순교사건이 있고나서 이 마을에서는 추석이 기쁜 잔칫날이 아닌, 무거운 슬픔을 서로 나누고 위로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교회 분위기도 연중 어느 때보다 엄숙해지지요. 부모와 형제의 참혹한 시신을 자기 손으로 수습해야 했던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기에 온 교회도 함께 그 아픔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수만교회에서도 교회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면 한국전쟁 당시의 순교사적을 항상 되새기면서, 이 시대와 오는 세대에까지 그 신앙의 뿌리를 지켜나가기를 다짐한다. 이현규 목사는 “세 교회 모두 과거에 비해 교세가 많이 약해진 게 사실이지만, 유족들과 마찬가지로 순교자들의 당당하고 결연한 신앙을 이어받겠다는 성도들의 각오만큼은 확실하다”고 밝힌다.

총회로부터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로 지정받는 일은 이들 교회에 뚜렷한 영적 자극이 될 것이다. 세 교회 목회자들은 순교 70주년이 되는 2020년을 더욱 뜻깊게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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