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문

상단여백
HOME 기획/해설 권혁재 목사의 다시 읽는 희망의 전도서 <대담한 낙천주의자>
허무하고 허무한 인생, 어디에 희망을 걸고 사십니까?[특별기고 / 대담한 낙천주의자] ① 희망을 걸어도 좋은가?
  • 권혁재 목사(민들레교회)
  • 승인 2018.07.11 15:01
  • 호수 0

사람의 생애는 울음으로 시작해서 통곡으로 끝난다. 인생의 여정 또한 슬픔과 억울함의 탄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전도서조차 허무로 시작해서 허무로 마친다. 문제는 ‘인생은 허무하고 무상하다’라는 전도서의 선언이 모세처럼, 고라의 자손들처럼, 그리고 야곱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의 생애에도 해당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궁극적으로 몇 개의 질문이 제기된다. 진정 해 아래 이 세상은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곳인가? 그리스도인에게도 현세는 무의미하고 허무한 것인가? 우리는 그저 현실을 체념하고 내세만 의지하며, 이 땅에 사는 동안 짐짓 달관한 척하며 견디는 수밖에 없는가?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현세 대처의 방식인가?

또한 전도서는 인생의 허무함을 확인하는 말씀인가? 전도서는 내세 천국에만 소망을 두라는 현실 도피적 가르침인가? 그렇다면 여기 이 생생한 현실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은 어떻게 성립되는가?

필자는 전도서 전 본문을 일별함으로 이 질문들의 답을 찾고자 한다. 전도서가 인생의 허무함과 현실 도피의 말씀이 아님을 밝히고자 한다.

 

서언: 수렁에 빠진 허무한 인생(1:1~18)

전도서는 문제 제기로 시작한다. 얼핏 보면 첫 말과 끝 말이 동일하게 ‘헛되다’(1:2, 12:8)이니, 수미쌍관법인 동시에 결론을 내포하고 시작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머리말은 해 아래에서 인생이 헛되게 보인다는 선언이다. 마지막 말씀은 전도서 전체에서 얻어 낸 답을 가지고 평가하는 새로운 선언이다. 머리말은 문제 제기 외에 해답의 어떤 언질도 없다.

저자인 전도자는 도발적인 질문을 터놓고 한다. “인생이 다 헛것일 뿐이라면 대체 이 모든 수고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미친 짓 아닌가!” 그는 모든 인생의 질문을 토해낸다. 나아가 신실한 신자의 죽음에 이르는 몸부림을 감추지 않는다. 전도서 곳곳(1:3 2:2 3:9 5:16 등)에서 무엇이 유익한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무슨 소득이 있으리오를 토해낸다.

저자의 천명(闡明)은 명료하고도 정연하다. 생은 반드시 죽음으로 귀착된다.(1:11) 그러니 인생의 수고는 쓸데없이 피곤한 쳇바퀴 돌리기다.(1:4~11) 하나님께서 주신 생애란 것이 고작 이런 괴로움뿐인가?(1:12~14) 게다가 이것이 최고의 철학(지혜와 지식)의 결론이라니!(1:16) 그렇다면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인생은 다만 바보짓일 뿐이다.(1:17) 차라리 생각 없는 목석이라면 좋으련만…(1:18) 이 어찌 허무하지 않은가!(1:2~3)

대체 이것이 다 무엇 때문인가? 잘못 출제된 문제를 풀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해 아래에는 답이 없다. 고차원이지만 왜곡된 문제, 따라서 답이 없는 문제 풀이 속으로 던져진 것이다!(1:15) 여기는 모래수렁이다.

 

첫째 마당: 희망을 걸어도 좋은가?(2:1~3:15)

1. 도전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솔로몬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뭘 하자고 내가 똑똑했던가?”, 또 “뭘 얻겠다는 건가?”라고 쓴다.(2:2, 15, 22) 단어는 다르지만 의미는 ‘미칠 듯 한 고뇌’로 동일하다. 솔로몬은 해 아래에서 인생 자체가 희망을 걸만 한 것인지 실험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경주했다.(2:1, 3하) 어리석은 짓인줄 알면서도 육신의 쾌락을 붙잡고서 늘어졌고, 인생의 일대 성취와 거리낌 없는 향유에 전력투구하기도 했다.(2:4~9) 성취와 향유 사이에서 솔로몬은 금한 것이 없었다.(2:10)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이 진정 답이 아님을 확인했다. 그 많은 시간과 수고가 기껏 바람잡기에 불과했다.(2:11) 그래서 그는 결국 거기에서 오는 웃음은 한낱 미친 짓이었고, 그때에 맛본 희락은 무슨 짓이었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한다.(2:12~15) 해 아래 세상엔 희망을 걸만 한 근거가 전혀 없다. 따라서 무엇에든 희망을 걸수록 고통만 가중된다.

현세의 흡족한 성취와 향유에 희망을 걸 수 없는 원인은 바로 죽음이다. 초롱초롱한 눈, 총명한 두뇌로 생의 목표를 성취한 지혜자든, 머릿속이 온통 깜깜하여 생을 형편없이 낭비한 우매자든 결국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되는데, 바로 죽음이다.(2:12~15) 생시에는 감히 상종도 못 할 현자와 우자가 죽어서는 같은 흙 아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눕다니, 그리고 똑 같이 잊히고 만다니, 이 어찌 미친 짓이지 않으리오!(2:16) 그리고 그게 전부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정직히, 애를 쓰고 살았는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운명이다.(2:17) 아직 살아 기동하는 동안 우리는 죽어 망각된다는 사실을 애써 밀어 내지만, 우리가 그리 하는 이유는 그것을 대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용감하게 그것을 직시한다. 그의 관찰 보고서는 이렇게 쓴다. “내가 죽고, 잊히고, 그리고 밤을 낮 삼아 노심초사 이룬 나의 성취는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고... 아, 이런 운명은 실망스럽다. 이것은 큰 악이다. 슬플 뿐이다. 허무하다.”(2:18~23) 하나님께서 인생 도처에 소소한 행복을 흩뿌리시고 그것을 누리게 하시고,(2:24~25) 부분적이나마 공의가 시행되게도 하시지만,(2:26상) 죽음과 잊힘(死亡)이 만일 전부라면 생은 헛된 바람잡기일 뿐이다.(2:26하) 여기는 희망을 걸만 한 근거가 없다. 인간이란, 그냥 이대로는, 세상에서 아무 소망도 없이 나부끼는 입김(헤벨, 엡 2:12)에 지나지 않는다. 희망, 정녕 걸 수 없단 말인가?

인생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수많은 곡절들이 얽히고 설켜 있다. 태어남과 죽음을 포함한 스물여덟 사건들을 피해 갈 인생은 세상에 없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 기쁘고 슬픈, 환영 받고 미움 받는 온갖 사연들이 뒤엉킨다.(3:1~8) 인간 존재란 이렇게 태어남으로 시작되어 고통 받다 죽어 잊힘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전부인가? 그리고 스물여덟 사건들이 숨 쉴 틈조차 없이 난마처럼 옥죄는 것이 전부인가? 그래서 저자는 또 다시 분노로 읊조리는가? “그 수고가 무슨 이익이 있는가?”(3:9)

 

2. 반전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노고를 신적 혜안으로 헤아려 본 솔로몬은 그 안에서 두 진리를 읽는다.(3:10~11) “하나님께서 이 노고들을 당신의 때에 따라 아름답게 지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마다 영원을 심어 놓으셨다.”(3:11)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영원에 잇대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3:14상)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사건들을 영원에 잇대어 지어 가고 계신다. 그러므로 생의 사건들은 그 자체로 보면 무의미한 파편들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지어 가고 계시는 아름다운 작품의 부분이요 과정들이다. 실로 신비롭지 않은가!

더구나 영원의 갈망에 응답하여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를 경외하는 사람의 인생은 형언할 수 없이 완벽하게 구성된 조형미를 갖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옛적의 일들과 장래의 일들을 가지고 만드시는 솜씨다. 그야말로 인간의 모든 수고를 쓰시면서 당신의 아름다운 작품을 친히 완성해 가시는 진정한 ‘신의 한 수’다. 이는 양자물리학의 ‘동시성’ 발현과도 같다. 모든 인격체는 각각 자신에게 부여하신 자유로운 의지를 완벽히 구사하여 일한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격체를 통하여 또한 자신의 뜻을 완벽하게 펼쳐 나가시는데, 이럼으로써 각각의 인격체와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뤄 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과거에나 현재에나 세상만사를 이렇게 경영하시는 줄을 알게 되면 더 이상 만사는 지루한 반복이 아니다.(3:14~15) 하나님의 이 일하심을 믿게 될 때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펼치시는 스물여덟 노고들을 오히려 은혜로운 선물로 받아 기쁨으로 누리며 기꺼이 선을 행한다.(3:12~13) 나는 다 알 수 없지만 영생을 주시고 영원에 잇대어 아름답게 내 인생을 빚으시는 하나님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확신을 가지고 스물여덟 때들을 논하는 솔로몬의 질문은 더 이상 분노와 절망의 탄식이 아니다. 잃어버린 정답을 회복한 신자의 설의법(設疑法)적 역설이다.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유익이 있고 소용이 100퍼센트 있다. 이 하나님을 영접하여 그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즐거워하는 삶을 영원에 잇대어 사는 경외의 지혜는 대담한 낙천주의를 가능케 하는 유익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이 설명되지 않는 세상의 난마 속에도, 세상사를 저주하거나 비난하거나 도피하지 않는 대신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 아름답고 위대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과 더불어 동역하며 이뤄 내는 과정이요 수단임을 알기에, 얼마든지 거기에다가도 희망을 걸고 사는 것이다! 이야말로 신자의 삶의 가장 높은 목적인 하나님 경외, 즉 하나님의 존엄을 높이는 가운데에서도 그분을 즐거워하는 삶이자(시 2:1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삶 아니겠는가?(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문, 소요리문답 1문)

권혁재 목사(민들레교회) ekd@kidok.com

<저작권자 © 기독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권혁재 목사(민들레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