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대담한 낙천주의자] ④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지혜를 갖추고 담대히 도전하라

여섯째 마당 : 듣지 않는 법칙(전도서 8:9~13)

 

도전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박해하고도 평화롭게 살다가 죽고, 그 악행이 문제되지 않은 채 슬그머니 덮이고 잊히는 일이 세상엔 많다. 성실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억울하고 허무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세상사는 그렇게 돌아가는 법이다. 인과응보, 상선벌악의 법칙이 꼭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런 세상에서 악인들이 더욱 용기백배하여 악을 행하게 된다. 심지어 악인이 선인보다 더욱 번성하고 장수하는 모순도 흔히 일어난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 법이다(8:9~12상).

반전

그러나 참 신자는 분명히 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의 삶만이 영원히 아름답게 완성될 것임을 말이다. 여기에 비하면 악인의 번영과 장수는 실체가 아닌 그림자일 뿐이다(8:12하~13).

 

일곱째 마당 : 체념 아닌 신앙(전도서 8:14~17)

 

도전

해 아래 세상에서 더욱 분통 터지는 일도 있다. 의인이 악인처럼 해를 당하고, 악인은 오히려 의인처럼 형통하는 일이다(8:14).

반전

그러나 경건한 지혜를 지닌 신자라면 하나님께서 이런 불의를 알고 계시며, 자신은 다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분복을 즐겁게 누리며 기쁘게 사는 것이 옳음을 또한 안다(8:15). 사람에게는 사건들의 전말이 감춰진 상태로 진행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고 아름다운 방향으로 완성해 가신다. 신자는 이 진리를 수용함으로써 인간의 한계 밖까지 다 알아야만 되겠다는 듯이 외람되게 애쓰는 대신, 하나님의 전능하고 전지한 섭리를 의지하면서 그것으로 충분히 여긴다(8:16~17, 롬 11:33~36·시 131:1~3 참조).

 

여덟째 마당 : 생의 예찬(전도서9:1~10)

 

도전

의인이 미움을 받고 악인이 사랑을 받기도 하는 것이 해 아래 세상의 사정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왜곡된 세상의 사정을 모르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 어그러진 흐름을 그대로 쓰고 계신다(9:1). 

세상의 불확실하고 불공정한 처우는 선악을 가리지 않는다. 의인, 선한 자, 깨끗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 그리고 맹세하는 자(6:13)가 미움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악인, 깨끗하지 않은 자, 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사랑을 받을 때도 있다. 그릇된 대우가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고 찾아오는 것이 이 세상이다. 

그러다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두 죽음으로 생을 마무리한다. 죽음이라는, 참으로 악하고 무자비한 법칙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선인에게도 악인과 동일하게 들이닥쳐 파괴하는 것이다(9:2~3).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9:3하)는 말씀처럼, 어찌 사람이 악에 받쳐 미치지 않겠는가!  

반전 

그래도 살아 있으면 아직 소망이 있다.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생을 얻음으로써, 죽음을 생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한 과정으로 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랬더라면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었고,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거룩하게 승화되었을 것이었다(9:4~6). 

그러하니 영원한 생명의 한 부분으로서의 해 아래에서의 생은 얼마나 찬란한가!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셔서 그의 생애 전체 사건들을 피로 씻어 구속하여 받아 주시는 생애의 순간들이란 얼마나 거룩하고 찬연한가! 하나님께서 그 생의 사건들 전체를 가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내실 사람의 생애는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잔칫집처럼 기쁨으로 먹고, 즐거움으로 마시며, 그리고 정갈하고 고아하게 몸과 마음을 단장할만 하지 않은가!(9:7~8) 

그저 허무할 수밖에 없던 나날들이 이제 하루하루 다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것들로 변했다. 인간은 더 이상 덧없는 그림자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을 담은 보석함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하나님의 작품은 당연히 창조의 꽃인 두 사람이 모여서 사람을 생산하고 양육해 내는 아내와 남편이요 그 둘의 가정이다. 이 신자들의 식탁은 진실로 영원 천국의 식탁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해 아래 세상의 일과 계획과 지식과 지혜도 의미 없이 흘려 떠내려 보낼 것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분복으로서 선용하여 누릴 선물들이다(9:9~10, 시 128:1~6 참고).

 

아홉째 마당 : 채비를 갖춰라(전도서 9:11~11:8)

 

도전

이제 마무리를 위해 정리한다. 해 아래 세상은 공정하지 못하다. 성실하고 희생적이며 지혜롭고 명철하며 유식하다고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여기는 온갖 재앙의 때와 사건들이 지뢰처럼 묻혀 있다. 당혹스럽게 이 재앙들은 착한 사람에게까지 자주 임한다(9:11~12, 여기에서 ‘시기’(에트)와 ‘기회’(페가)는 동의어로서, 3:1의 ‘때’나 ‘사건’과 같다. 그 자체로는 중립적이지만, 문맥상으로 12절의 ‘재앙의 날’을 가리키므로 부정적 의미로 쓰였다). 

인간이란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 미천한 사람의 조용한 지혜는 그 훌륭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멸시당하기 일쑤다(9:13~16). 비록 내용이 올바른 것이더라도 그것을 제시하는 사람이 강경하지 못하고 온순하기만 해서는 뜻을 이루지 못한다. 목소리가 큰 악인 한 사람에게 주도권을 빼앗겨서 일를 망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9:17~18). 

인간이란 강포한 비진리의 힘에 굴복하여 스스로 존귀성을 포기해 버릴 만큼 약하고 악하다. 이는 마치 죽은 파리 몇 마리가 향수 전체를 변질시키는 것과도 같다(10:1). 지혜자와 우매자는 오른쪽과 왼쪽만큼이나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우매자는 심지어 어리석은 논리인 줄조차 모르고 주절주절 그것을 늘어놓곤 하는데, 이 무식한 주권자가 해 아래 세상에서 대중의 환영을 받기 일쑤다. 

그러니 여기를 살아내려면 다소 비굴하더라도 공손한 재략(shrewd)을 발휘해야만 한다(10:2~4). 해 아래 세상은 미련한 힘이 정의로운 진실을 짓밟을 때가 많다. 여기는 흔히 이렇게 질서가 전복되곤 한다(10:5~7). 

반전-1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단단히 채비를 갖춰야 한다. 그 채비가 무엇인가? 앞서 말한 그것,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는 지혜다(10:8) 

긴 호흡으로 살펴 본 바와 같이 해 아래의 세상은 위험하다. 대단히 위험하다. 이 세계는 애초부터 답이 누락되었고, 그 구조가 뒤틀렸으며, 일반적인 정의의 법칙이 자주 먹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이 이렇게 위험천만한 곳임을 미리 알고 대처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는 지혜로 단단히 무장하고 들어서지 않으면, 순수한 신자라도 살아남을 수가 없다. 끝없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평하는 만신창이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일생을 마쳐서야 신앙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신자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는 이 지혜의 연장을 날카롭게 연마해야 하고, 이 방책을 미리 베풀어야 한다(10:8~11). 이 지혜가 아닌 다른 인생관들은 모두 다 제 인생을 삼키고 미치게 만드는 이설(異說)들일 뿐이다. 하나님 외에 누가 인간의 생애를 영원에 잇대어 책임질 것인가? 

이 지혜가 없는 사람은 사실 인생을 감당할 입구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의 수고는 하면 할수록 더욱 자신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10:12~15). 무지하고 무력한 관료들이 올바른 방책도 없이 그저 흥청망청 연락만 즐기면, 국가는 쇠한다. 반대로 국사를 바르고 힘 있는 책략을 가지고 질서정연하게 운영하면, 국가는 흥하는 것이 당연하다. 잔치도 좋고 희락도 좋으며 또 포도주도 즐겁지만, 바르고 강력한 정책과 실력을 충분히 갖춘 상태에서나 통하는 것이다. 국정에 대한 힘 있는 정책과 실력을 미비한 채, 일도 할 줄 모르고 게다가 흥청망청 눈앞의 연락만 즐기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이 분명하다. 

필수적인 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는 지혜로 잘 무장하고서 인생에 임하는 것이다. 이 지혜는 마치 풍부한 돈의 힘처럼 인생 전체의 성패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 지혜가 없으면 생애 전체가 그릇가게 된다(10:16~19). 해 아래 세상은 그저 성실하게 그저 정직하게만 살면, 정직한 보상을 받는 그런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은 대단히 위험한 곳이다(10:20).

반전-2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는 지혜로 단단히 채비를 갖춘 후에 신자는 대범하게 인생에 돌입해도 좋다. 담대하게 생을 투자하라. 위축될 필요가 없다. 염려에 찌들어 위축되어 산다고 해서 반드시 안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잃고 얻음은 하나님께서 영원에 잇대어 결정하신다(11:1~2).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질 수밖에 없지 달리 무슨 일이 생길 수 있겠는가?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을 수밖에 달리 무슨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하며 ‘바꿀 수 없는 숙명’이라고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분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신자라면 절대로 그런 소심하고 비관적인 심정을 가져선 안 된다. 

전지, 전능,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즉 ‘거룩한 신의 한 수’를 믿는 신자라면 그렇게 바람과 구름 탓만 하며 하염없이 움츠릴 필요가 없다. 비록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바람을 그것의 길로 불게 하시고 태아의 뼈를 완전하게 자라게 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지혜로운 신자는 이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 그러므로 해가 중천에 뜬 한낮이든 이미 저물어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밤중이든, 그는 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용감하게 생을 투자하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넘겨 드린다(11:3~6). 

아, 이 지혜로 단단히 채비를 갖춘 경건하고 대범한 낙천주의자에게는 장엄한 태양빛을 눈으로 직시하는 일이 얼마나 감사하고도 벅찬 희열이겠는가! 그에게 있어서 삶은 더 이상 피곤한 노고일 수 없다. 비록 많은 어둠과 위험과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게 되겠지만, 그래도 그는 여기에서 더 많은 대로(大路)들과 더 깊은 샘을 발견할 테니 어찌 즐겁지 않으리오(11:7~8). 그는 이 해 아래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희망을 걸고 살 수 있음을 누누이 확인한다.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고 지상에서 천국을, 현실에서 영생을 살아가는 하나님 경외자야말로 대범한 낙천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누구든지 냉소적일 수 있다. 하지만 대담한 낙천주의자가 되라.” 이 신자에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이 신자에게 있어서는 오늘 여기의 모든 삶도 얼마든지 희망을 걸만큼 경건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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