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역사관 개관 기념 역사기획] 다시 읽는 총회 백년사 (3) 총회의 신학적 도전과 시련(상)

초기 한국 장로교회 신학적 전통, 평양신학교서 형성 …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 강조

평양장로회신학교는 1901년 5월 마포삼열 선교사가 그의 사택에서 김종섭과 방기창 두 사람을 목사 후보생으로 선정하고 신학교육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출범하였다. 그 해 9월 장로회연합공의회가 신학교 설립에 관한 안건을 결의한 후, 공의회는 양전백 길선주 이기풍 송린서 등을 추천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03년 조선 장로회 신학교가 평양에서 정식으로 개교하였고, 1904년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선교사가 초대 교장으로 추대되었다.

김효시 교수<br>(광신대)

신학교 출범의 배경에는 사경회를 개최하고 신학반(언더우드 선교사가 1890년 최초로 개설함)을 만들어 운영하는 등 평신도 지도자를 위한 교육에서 더 나아가, 전문적 신학교육을 받은 한국인 지도자 양성에 대한 필요성이 깔려 있다. 이후 평양신학교는 한국 장로교회의 대표적 신학교로서 보수주의 정통 칼빈주의 신학의 요람이 되었다.

평양에서 개교한 장로회신학교는 주로 미국 북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초기에 한국에 온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보수주의 운동으로 역사가 깊은 맥코믹신학교 출신들이었다.

19세기 미국 북장로교회의 신학은 프린스턴 신학으로 대변되는데, 대표적 신학자들로는 아치발드 알렉산더, 찰스 핫지, 벤자민 워필드 등이 있다. 개혁주의적 전통을 계승한 프린스턴 신학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매우 강조하였다. 또한 미국 남장로교회의 신학은 유니온신학교와 컬럼비아신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대표적 신학자로는 제임스 H. 돈웰과 로버트 L. 답네 등이 있다. 미국 남장로교회는 칼빈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웨스트민스터 표준서의 가르침을 따랐다. 이들도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신학과 신앙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았다.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은 평양신학교에서 교수하였던 선교사들에 의해 형성되어 갔다. 허버트 블레어는 “강조되고 연구된 유일한 교과서는 성경이다”고 말하면서 평양신학교가 성경 중심의 신학교육을 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1920년에 채택된 신학교의 신앙고백에서도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며 모든 행위의 기초”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신학교육의 목적은 “성경을 진실하게 믿고, 적절히 이해하며,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명쾌하게 주해하는 복음 사역자, 그리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복음적인 구속을 철저히 그리고 단순히 전력을 다해 설파하는 복음 사역자를 훈련시키는데 있다”고 하였다.

평양신학교 초대 교장을 지낸 마포삼열 선교사는 멕코믹신학교 출신으로 ‘한국 장로교회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그는 거룩한 삶의 표준이 되는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 여기며 성경의 최고 권위를 강조하였다. 그는 고백하기를 “한국에 왔을 때 십자가의 도 이외에는 전하지 않을 것이며, 살든지 죽든지 구원의 복음만을 전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초기 선교부의 신학적 경향에 대하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복음에 기초한 복음주의 정신에 투철하였다고 언급하였다.

▲ ❶한국 장로교회의 신학 요람이 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전경. ❷평양신학교의 수업 모습. ❸1901년에 소집된 장로회공의회. 평양신학교를 통해 초창기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을 정립한 ❹곽안련 ❺마포삼열 ❻이눌서 선교사.

평양신학교 교수였던 챨스 클라크(한국명 곽안련)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인데, 그는 구 프린스턴의 신학적 입장을 따랐던 철저한 보수주의자로서 성경의 절대 권위와 완전축자영감설을 신봉하고 가르쳤다. 제2대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헌신하였던 스테시 로버트(한국명 라부열) 선교사는 프린스턴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강조하였다.

유니온신학교 출신으로 남장로교 선교사였던 윌리암 레이놀즈(한국명 이눌서)는 평양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며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기초를 놓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한국인 목사 교육을 위한 7가지 원칙을 언급하면서, 신학교육은 성경에 기초하여 이뤄져야 하며, 목회자가 될 자는 기본적인 영적 자질을 갖춰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성경을 잘 가르치는 성경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평양신학교가 출발할 당시에는 5년의 교과과정을 채택하였는데, 매년 3개월의 강의와 9개월의 현장 목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1919년에는 학제를 변경하여 3년으로 줄이고, 1년에 2학기제로 운영하였다. 1925년에는 한국인 교수들이 강의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는데, 남궁혁 교수가 첫 번째 한국인 강사로 가을학기부터 강의를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이성휘 김선두 목사가 임시교사로 강의하였고, 1928년에는 박형룡 박사가, 1930년에는 강규찬 목사 그리고 1936년에는 김인준 목사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한국인 강사가 6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평양신학교는 1935년부터 신사참배 문제로 큰 시련에 직면했다. 그리고 어려움을 겪다가 1903년 개교 이래 8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기록을 남기고 평양신학교는 1938년 자진 폐교를 결정하였다.

1907년 독노회가 출발할 당시 채택한 12신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인도장로교회가 요약해서 12개 조항으로 정리한 것을 서문만을 수정하여 받은 것이었다. 이 신조는 개혁주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한 것으로 칼빈주의 신학에 기초한 것이다. 그 주요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1.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본분에 있어서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2. 하나님은 한 분 뿐이시니 오직 그만 경배할 것이다.

3. 하나님의 본체에 세 위가 계시니 성부, 성자, 성령이신데 이 세 위는 한 하나님이시라. 본체는 하나요,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시다.

4. 하나님께서 모든 유형물과 무형물을 그 권능의 말씀으로 창조하사 보존하시고 주장하신다.

5. 하나님이 사람을 남녀로 지으시되 자기의 형상대로 지식과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사 생물을 주관하게 하셨으니, 세상 모든 사람이 한 근원에서 나왔은즉 다 동포요 형제다.

6. 아담으로부터 보통 생육법에 의하여 출생하는 모든 인종들이 그의 범죄에 동참하여 타락하였으니, 사람의 원죄와 및 부패한 성품 밖에 범죄할 능이 있는 자가 일부러 짓는 죄도 있은즉 모든 사람이 금세와 내세에 하나님의 공평한 진노와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7. 인류의 죄와 부패함과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고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그의 영원하신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으니, 그로만 하나님께서 육신을 이루었고 또 그로만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8. 성부와 성자로부터 오신 성령께서 인생으로 구원에 참여하게 하시나니 인생으로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시며 그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다.

9.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사 사랑하심으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고 그 기쁘신 뜻대로 저희를 미리 작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을 삼으셨다.

10.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례는 세례와 성찬이라.

11. 죽은 자가 끝 날에 부활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심판하시는 보좌 앞에서 이 세상에서 선악 간 행한 바를 따라 보응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신조 위에 기초한 한국 장로교회는 철저히 성경에 기반한 개혁주의 정통 보수신학을 표방하고 영적 부흥을 계속하였다.

▲ 평양신학교 시절인 1923년 제작된 신학지남 표지.
1918년 평양장로회신학교의 학술연구논문집으로 창간됐다. 평양장로회신학교의 교사와 신학생들에게 신학의 광해(廣海)에서 향방을 지남(指南)하려는 목적으로 출간되었다. 계간지로 출간한 후 구독자가 2500명에 이를 정도로 호응이 높았다.

신학지남은 장로교회의 유일한 학술지로서, 장로교회의 신학적 기반과 정통 보수신학을 정립하는 일에 최전방에서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 때 칼빈주의 정통신학에 도전하는 자유주의적 신학사상의 글들이 실리게 되면서 신학논쟁에 불이 붙기도 했다.

신학지남은 1940년 가을호(22권 5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가 1954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계승한 장로교 총회신학교가 속간호를 낸 후 현재까지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정론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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