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 순수성 지키고 자유주의 도전 막았다”

한국 개혁교회 교리와 설교 근간 마련 … 평양신학교 전통 총신에 접목시킨 탁월한 신학자

죽산 박형룡 목사(1897년 3월 28일(음)~1978년 10월 25일) 소천 40주기를 앞두고 박형룡 목사를 회고하는 연재기사를 게재한다.<편집자 주>

 

▲ 박형룡 목사

교단신학교인 총신대학교 사당캠퍼스를 드나드는 이들은 누구나 학교 초입에 서 있는 교훈비를 보게 된다.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사가 되라“

이 다섯가지 교훈은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목사의 설교 대지 다섯항목을 옮긴 것이다. 박 목사는 1948년 6월 9일 평양신학교 후신으로 세웠던 장로회신학교 특별기도회에서 학교의 운영방향을 제시하는 말씀을 전했다.

박 목사의 설교가 그대로 총신대의 교훈이 됐다는 사실은 박 목사가 교단의 신학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신학적 입장에 따라 박형룡 목사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그가 한국교회와 신학계의 거목이요 한국개혁신학의 거대한 산이었다는 표현에 이의를 달 이가 없다. 그는 개혁신학을 한국교회에 소개했으며 신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일평생 신신학과 맞서 싸웠다.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박형룡 목사는 1897년 평안북도 벽동군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표현대로 “산골마을 작은 진흙빛 초가집”에서 출생했으며 대주가(大酒家)인 아버지를 둔 탓에 가세는 쪼들렸다. 가난은 오랫동안 그를 좇아다녔다. 그 덕에 초등학교를 6번이나 옮겨 다녔고 중학교 시절부터 학교에서 노동을 하면서 고학으로 공부를 이어갔다.

그러나 가혹한 가난일찌라도 그의 탁월한 능력을 묶어 놓을 수 없었다. 선천 신성중학교 시절(1914년) 목회자로 살기로 서원한 이래 농촌 전도와 농촌교회 순회 설교를 다녔다. 숭실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숭실전도대에 속해 전국으로 순회전도를 하면서 말씀을 전했고(1920년) 목포에서 행한 설교 내용 때문에 일제에 의해 보안법위반으로 체포돼 10개월의 영어생활(囹圄生活)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탁월한 설교가였고 복음으로 백성들을 개화시켜야 한다는 기독교 민족주의 의식에 사로잡혔던 피끓는 청년이었다.

그는 서툰 한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가르침만으로는 실력 향상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품고 미국 유학을 떠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있던 탓에 남경 금릉대학(1921년)에서 수학을 먼저 거친 뒤 프린스턴신학교(1926년)의 문을 두드렸다.

▲ 총신대학교와 총신대신대원 교정에 있는 유명한 교훈비는 박형룡 목사의 설교 대지에서 따온 것이다.

박형룡 목사가 공부하던 시절 프린스턴신학교는 보수적인 색채를 유지할 때였다. 그는 보수신학자인 메이첸 박사 등과 교제했으며, 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에 기초하여 영국과 스코틀랜드,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미국에서 꽃 피운 장로교회의 신학을 배울 수 있었다.

1927년 귀국 후 평양신학교 강사로 출발하였으나 금세 강의능력을 인정받아 1931년 정교수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는 귀국한 상태에서 <자연과학으로부터의 반기독교적 유추>(Anti-Christian Inferences from Natural Science)이라는 논문을 미국 루이스빌남침례신학교로 보내 Ph.D를 취득할 정도로 영어와 신학적 소양이 뛰어났다.

박 목사는 1938년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반대로 폐교한 뒤에는 도일(渡日)해서 성경을 주석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서 만주 동북신학교 교장(1942년)으로 활동했다. 또 봉천 동북신학교 교장(1945)을 거쳐 부산고려신학교 교장(1947), 남산장로회신학교 교장(1948년), 총회신학교 제2대 교장(1948년) 총회신학교 제3대 교장(1960년), 총회신학대학 제7대 교장(1969년)을 역임하면서 1972년 은퇴할 때까지 총신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탁월한 설교가요 학자

▲ 평양신학교에서 변증학을 가르치던 교수 시절의 박형룡 목사의 모습. 앞줄 왼쪽 라부열 교장, 우측 박형룡 목사, 뒷줄 오른쪽 두 번째 권세열 교수, 맨 왼쪽은 남궁혁 박사. 1936년.

박형룡 목사는 총신의 신학잡지인 <신학지남>과 <신학난제선평>, <교의신학 7권> 등의 저서를 통해 서구신학이 정리한 성경의 진리를 한국의 실정에 맞게 소개하는 일에 공헌을 세웠다. 특히 <교의신학 7권>은 그의 신학적 역량을 엿볼 수 있는 걸작 가운데 하나인데 미국과 화란의 조직신학을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분량 자신의 논지를 펼쳤다. 특히 내세론과 천년설 부분은 한국적 상황을 고려해 기술했기에 한국신학의 세계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오늘날 한국의 보수교단들이 교회에서 배우는 교리와 설교의 근간은 사실 박형룡 목사의 가르침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원주의의 불인정, 자유주의에 대한 정죄, 여성안수 반대, 세계교회협의회(WCC) 반대, 유신진화론과 고등비평 반대와 같은 사상은 박형룡 목사의 신학적 견해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박 목사는 그의 주장을 강의실에서만 펼치는 사람이기 보다 행동하는 신학자였다. 남대문교회 김영주 목사의 창세기 모세 저작권 부인과 김춘배 목사의 여권 문제를 다룬 글에 대한 총회 조사위원을 역임해서 그들을 비판했다. 장공 김재준 목사의 글을 <신학지남>에 싣지 못하도록 했으며,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총회연구위원(1956년)의 일원으로 교회연합운동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 과정에서 박 목사 뿐만 아니라 교단총회는 신신학을 주장하는 이들과 충돌을 겪을 수 밖에 없었으며 이때 박 목사는 항상 보수적인 입장에서 논지를 펼치며 대들보 역할을 했다. 신학적 색채에 대한 타협없는 공방 끝에 기장과 예장통합이 총회에서 탈퇴했고 박형룡 목사가 이끌었던 교단 신학교는 초기 선교사들이 전해준 구미와 화란의 신학을 오늘까지 계승하고 있다.

박형룡 목사는 목회현장과 전도현장의 상황을 고려한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신학의 순수성을 지키고 성도들의 신앙개조를 통해서 복음화된 나라를 이루겠다는 그의 확신을 오늘날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예배와 전도에 힘쓰는 교단이라는 트레이드마크를 갖게 했다.

<박형룡 박사 회고록>을 편저한 정성구 목사(한국칼빈주의연구원 원장)는 “박형룡 목사는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총신에 접목시킨 대들보였다”면서 “개혁주의신학을 소개하고 자유주의의 도전을 막아서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박형룡의 신학연구>를 저술한 장동민 교수(백석대)는 “우리는 박형룡의 일생에 걸친 노력과 투쟁의 덕분으로 기독교 복음의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또한 자유주의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박형룡 목사의 사후 40년이 된 오늘날, 신앙의 순수성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한국의 개혁교회들이 신학적 정체성을 상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제 박 목사가 생전에 지키려던 신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 보수할 것은 보수하고 새롭게 할 것은 새롭게 하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의 몸부림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바람이 많아지고 있다.

▲ 박형룡 목사는 소천 후 공로목사로 있던 청암교회 파주 묘원에 안장됐다. 묘비에는 “한국의 정통신학의 수호자”라는 글과 더불어 디모데후서 3장 16~17절 말씀을 새겼다.

박형룡 목사는 청암교회 공로목사였다. 1948년 청암교회를 설립하기 전 청암교회 초대 이환수 목사는 남산 총회신학교 상무이사였고, 박형룡 목사는 학장이었다. 박형룡 목사의 사택은 청암교회 인근에 있었으며 사택 옆에는 남산총회신학교 신학생 기숙사인 ‘덕영학사’가 운영됐다. 청암교회 설립예배에는 35명이 모였는데 이 가운데 17명이 신학생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박형룡 목사는 청암교회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청암교회는 1962년, 당시 교회로서는 드물게 묘원조성을 준비했다. 청암교회에는 6.25 전쟁으로 월남한 이들이 많았다. 속히 통일이 되어 고향으로 갈 것을 기대했지만 분단이 길어지면서 이 땅에서 죽더라도 한 곳에 모여있다가 통일이 되면 뼈라도 함께 휴전선을 넘어가야겠다고 마음을 모았다. 그래서 북향한 산지를 사서 묘소로 가꾸었다.

그러나 묘소가 향한 방향 때문에 상대적으로 햇볕을 많이 받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게 됐다. 청암교회 묘원이 조성됐을 때와 달리 주변 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묘원이 조성되던 당시에는 산 아래로 너른 논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날 논이 있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묘원 주변을 건축폐자재 재활용공장들이 차지하고 있다. 대형 트럭들이 수시로 오가고 있으며 폐자재와 흙을 깨는 소리와 먼지가 날라다니고 있다.

박형룡 목사의 묘지는 청암교회 묘원 가장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박형룡 목사의 묘 옆에는 사모 박순도 여사와 요절한 큰 아들 모세씨가 나란히 누워 있다. 묘원의 끄트머리에 있는 관계로 폐자재 공장의 작업장을 작은 언덕 하나 두고 마주보고 있다. 또 습지이기에 교회에서 아무리 정성껏 관리해도 잔디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박형룡 목사의 묘소를 찾아가는 일도 보통은 아니다. 묘소 앞을 드나드는 대형 차량들의 움직임에 신경을 써야 하고 막상 묘원 앞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이정표 하나 없기에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청암교회는 최근 박형룡 목사 가족 묘의 이장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묘원 중앙 쪽으로 올려 드리므로, 좀 더 좋은 환경에 위치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런데 이장에는 수백만원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청암교회는 박형룡 목사 40주기를 맞아 총회 또는 총회역사위원회가 묘소 이장과 단장에 협력해 주기를 희망하고 있다.

한때 박형룡 박사기념사업회가 한시적으로 총회 차원에서 조직되어 활동했던 바가 있었다. 총신대학에서도 기념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총회나 총신대에 박형룡 박사를 기념하는 활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형룡 목사가 소천한지는 이제 수십년이 지났다. 그의 신학노선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분명히 교단신학의 근간을 확립한 인물이다. 그런 그이지만 어디에 안치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는 교단의 교회들과 성도들은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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