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 40주년 기념 기획] 한국교회 거목 박형룡 목사 ③장차남 목사에게 듣는 박형룡 목사의 삶
[소천 40주년 기념 기획] 한국교회 거목 박형룡 목사 ③장차남 목사에게 듣는 박형룡 목사의 삶
  • 노충헌 기자
  • 승인 2018.10.25 23: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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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대로 행하고 사익 구하지 않은 스승이었다”

차가운 가슴으로 강의했고 뜨거운 심장으로 설교 … 진리수호 열정 늘 행동으로 옮겨

박형룡 목사는 위대한 신학자였다. 그렇다면 박 목사의 인품은 어떠했을까? 박 목사의 제자인 장차남 목사(증경총회장)에게 들어본다. <편집자 주>

▲ 장차남 목사가 박형룡 목사는 연구와 강의에 충실했으며 고매한 인격으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박형룡 목사와 관계는?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박형룡 목사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그 분의 신학과 인품을 동경했다. 그 분은 이미 한국교회의 중심에 서 계셨다. 나는 제44회 총회에서 연동측의 이탈로 총회가 양분된 후 예과 1학년으로 총신에 입학했다. 설교시간에만 박 목사님의 모습을 뵌 기억이 있다. 본과에 들어가서 <교의신학> 7과목을 직접 배웠고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여 박 목사님의 <교의신학>을 다시 공부했다.

대학원 졸업 이후 부산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오래 있었다. 부산중앙교회 담임이 노진현 목사였는데 이 분은 총회신학교 교장서리를 맡았다. 박형룡 목사님이 교장일 때는 이사장이기도 했다. 박 목사님은 부산에 오면 노진현 목사를 찾아왔고 나 역시 박 목사님을 만나뵐 수 있었다.

▲박형룡 목사의 강의모습은?
=박형룡 목사님은 강의를 시작하면 교탁에 앉아서 고색창연한 강의노트를 꺼내어 읽으셨다. 어떤 페이지에는 다른 종이에 쓴 내용을 뜯어 붙여놓았다. 글씨를 틀리게 썼을 때 그 장을 통째 찢지 않고 그 틀린 글자 위에 이면지를 잘라 붙이고 맞는 내용을 다시 쓰셨기 때문이었다. 목사님은 노트의 내용을 몇 줄 읽고 설명하고 다음으로 뛰어넘어가서 또 읽고 설명했다. 질문은 거의 받지 않았고 질문을 해도 자상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박 목사님은 일어서지 않았고 시선도 거의 노트에 고정시켰다. 무미건조하였고 재미있는 수업은 아니었다. 아마도 자신이 연구한 내용을 전달하기에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원 수업에서는 주로 영문서적을 텍스트로 해서 박 목사님이 지정한 책을 수강자가 한 장씩 번역 요약하여 유인물을 만들어서 발표하게 했다. 발표가 끝나면 박 목사님의 논평이 있었는데 발표자의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요소를 잘 설명해 주셨다.

박형룡 목사님은 원래 활발하고 열정을 가지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의 과묵하신 모습을 많이 봤다. 아마 교수로서 평생 활동하면서 자중하는 인격을 형성하셨을 것이다. 우리는 그 분이 자기 자랑이나 변명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흠을 보는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다. 하루는 수업 중에 한 학생이 김린서 목사가 ‘한국 교회는 왜 싸우는가?’라는 팸플릿에서 박형룡 목사를 격하게 비난한 일을 말하면서 울분을 토했다. 박 목사님은 헛웃음을 웃고, ‘그래요’할 뿐 일체 응대치 않고 넘어갔다. 참으로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학생들이 ‘저런 분이 어떻게 자식을 두었을까’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설교는 달랐다. 익히 박 목사님은 숭실대학교 시절 숭실전도대에 속해서 전국 순회 전도를 하면서 설교를 담당했다. 어떤 해는 학생신분으로 70회나 연사로 나설만큼 인기가 있었다. 결혼도 그의 설교에 감동을 받은 평양 장대현교회 여신도였던 장모가 자신의 딸 박순도 양과 만나게 해서 이뤄졌다.

신학교 시절 박 목사님의 설교는 내용이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시의적절하여 감동을 주었다. 내가 그의 설교에서 가장 큰 감명을 받은 것은 1960년 12월 고신과의 합동총회 때였다. 그는 승동교회에서 만장한 양 교단의 목사 장로 총대 및 방청객들 앞에서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눈물을 뿌리며 외친 그 말씀은 온 청중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 1975년 총회대표로부터 정통신학자 유공자 표창을 받는 박형룡 목사(아래 사진, 왼쪽부터 이영수 박형룡 박성겸 목사).(사진제공=총회교육출판국)

▲목회의 교훈을 하셨는가?
=박 목사님은 교훈도 많이 하지 않으셨다. 수업에만 충실하신 편이었다.

▲말씀보다 실천에 힘쓰셨나?
=박 목사님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컸으며 교단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숨어있지 않고 신학적 소신을 밝혔다. 그 분은 학창시절 신사참배 반대를 했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으며 해외로 망명을 했다. 박 목사님이 유학을 가서 변증학을 공부한 이유도 일본에서 발행된 간행물에서 ‘종교에 대한 무종교자의 견해’라는 글을 읽고 의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분리주의자라고 비판을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박 목사님은 교회에 대한 애정과 진리수호를 위한 열정을 가지고 소신을 행동으로 옮겼다. 박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소수의 신학자이기도 했다.

예장통합과 에큐메니컬 문제로 갈라질 때 교단은 에큐메니컬 반대가 주류였다. 총회장, 부총회장, 서기, 부서기와 증경총회장 다수가 에큐메니컬을 반대했다. 교단 주류는 박형룡 목사의 교의신학을 찬동했다. 에큐메니컬 반대편이 법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정통이었다. 단지 선교사들이 재정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찬성 쪽으로 갔기 때문에 합동측이 통합측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실은 그 반대다.

박형룡 목사님은 우리 교단 고유의 신학을 그대로 지켜왔다. 박 목사님이 총회신학원 교장일 때 학교가 거간꾼에게 속아서 3000만환이라는 재정손실을 보게 됐다. 그러나 박 목사님은 학장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이 있었을 뿐 고의성이 전혀 없었다. 박 목사님을 공격할 때 3000만환 사건을 끄집어내는 이들이 있는데 이것은 떳떳하지 못하다. 모 교단들은 일본 천리교에서 조선천리교로 넘겨준 재산을 두고 싸웠고 이 가운데 미군정까지 개입하게 했다. 일본인의 재산이 한국으로 넘어온 것을 두고 탐내고 다툰 것과 비교할 때 3000만환 사건은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숭실대 교장 윤산온 박사가 신사참배 압박을 받았을 때 박형룡 목사와 주기철 목사를 불러 자문을 구했다. 윤 박사는 신사참배 타협안으로 한국인 과장을 보내 참배를 하고 선교사들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생각을 물었을 때 박형룡 목사는 신사참배에 대한 분명한 반대 입장을 밝혔고 윤산온 박사는 그 의견을 참고해서 일제에 보내려던 답변서를 난로 속에 던져넣었다는 일화가 숭실대 100년사에 나온다. 박형룡 박사의 삶은 일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신학적 입장을 유지하고 믿는 바를 실천했으며 사사로운 유익을 구하지 않은 존경할만한 스승이다.

박형룡 목사는 무엇보다 성실한 학자였다. 6.25 전쟁으로 대구에 피난을 내려갔던 난세에 ‘피난총회신학교’가 운영됐다. 이때 교회 구내에 마련된 교수 사택 단칸방에서 박형룡 목사의 4가족이 생활했다. 박 목사는 빈 사과 상자를 책상 삼아 대개 밤 12시나 새벽 1시까지 강의를 준비하고 책을 읽었다. 강의 시간이 끝나면 교수 연구실에 가서 연구하다가 귀가하던 그였지만 집에 와서도 공부에 힘썼다.

박형룡 목사가 1971년 총신대학교에서 영구 은퇴한 후 서울 봉천동 자택에 머물 때였다. 1976년경 7월 어느날 박 목사는 예고 없이 아들 박아론 목사가 거주하는 서울 남현동 자택을 방문했다. 깜짝 놀라는 가족들에게 박형룡 목사는 초등학교 3학년이던 손녀의 생일을 축하하러 왔다고 말했다. 더운 여름철이었지만 박 목사는 ‘벙거지 모자’를 쓰고 버스를 탔다. 당시 박형룡 목사는 80세의 고령이었다. 박아론 목사가 아버지 박형룡 목사를 매주 찾아뵙고 안부를 물었기에 그때 선물을 전달할 수도 있었는데 직접 찾아왔던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박형룡 목사가 손녀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10분 만에 돌아갔다는 것이다. “미안하다. 내가 책 쓰는 일이 있어서 빨리 집으로 가봐야 하겠다. 오래 앉아 있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박형룡 목사는 <박형룡박사저작전집> 20권을 남겼다. 그런데 저술을 한 기간이 총신대 은퇴 이후 소천까지 7년 동안이었다. 은퇴의 서운함과 충격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박 목사는 평생에 썼던 저술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서 대작을 남기는 일에 매진했다.

박형룡 목사는 검소했다. 양복이 서너 벌 있었지만 늘 한 벌의 양복만 입기 일쑤였다. 와이셔츠와 넥타이는 언제나 신학생들이나 졸업생들이 선물한 것을 매었고 스스로 옷이나 넥타이를 사지 않았다. 총신대학교 초대 총장이 된 후에 서울 봉천동 자택에서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 1969년 가을 사당동 초창기 총신의 원로교수들과 함께 서 있는 박형룡 학장(위 사진 윗줄 왼쪽부터 안용준, 이상근, 박윤선, 박형룡, 명신홍).

박형룡 목사는 겸손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대화할 때 항상 자신을 “저”라고 지칭했다. 그는 자기 자랑을 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보낸 편지에 반드시 답장을 했으며 ‘박형룡 배상’으로 끝맺었다. 학생들이 인사하면 허리를 굽혀 답례를 했다. 학생들이 즉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해왔을 때는 수첩에 적어두었다가 궁리한 후 수일 후에 반드시 답변을 전달했다.

박형룡 목사는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노력했다. 박아론 목사는 “내가 어렸을 때 손찌검이나 매질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으셨다”고 회상했다. 박형룡 목사는 가정예배의 모범을 보였다. 평일에는 오전, 방학 때는 오전과 오후 두 번씩 예배를 드렸다. 예배 때마다 찬송을 10장씩 불렀다. 박 목사는 가정예배 때마다 설교를 했고 사모 박순도 여사는 남편의 설교말씀을 깨알 같은 글씨로 노트에 받아 적었다.

박 목사 사택에 3년여 거하면서 조직신학 원고 정리를 도왔던 홍정이 목사(증경총회장)는 “박 목사님의 잔잔한 톤의 영감있는 음성, 여러 가지 고난, 신학논쟁을 이겨내신 그 늠름한 모습만 보아도 감동이요 은혜였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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