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개혁주의 모델 박윤선 목사 ③기도와 삶

2시간 이상 새벽기도는 생활… 확신있는 가르침과 영감 넘치는 <성경주석> 집필 원동력

 

박윤선 목사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기도의 사람’이라고 부른다. 언제 어디서 그를 만났든지 그가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지 기도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항상 기도했다.

박윤선 목사는 <성경주석>이라는 고도로 지적인 창작물을 저술했고 일평생 신학교 강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수많은 글을 발표하고 남다른 분량의 강의와 설교를 감당해야 했다. 그 누구보다도 이성적인 사람이었고 바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죽기내기로” 기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윤선 목사의 기도생활에 대한 기록은 1927년(23세 때) 숭실전문학교 재학 시절부터 찾아볼 수 있다. 숭실전문학교 동기인 고 방지일 목사는 ‘우리에게 있는 나다나엘’이란 글에서 “박윤선은 새벽마다 교실에 가서 엎드려 살았다. 특별한 기간에는 유단 한 조각을 준비했고 또 미숫가루도 병에 담아 가지고 산으로 갔다. 유단은 천에다가 기름을 먹인 것으로 산이나 들에서 (땅바닥에서부터) 차 올라오는 습기를 막기 위해 사용했다”고 회상했다.

박윤선 목사는 193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서도 친구들과 함께 새벽마다 인근의 장대현교회를 찾아가서 열정적으로 기도했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 의자를 잡은 손에서 피가 나올 정도였다. 그들의 기도모습에 놀란 장대현교회가 급기야 출입을 만류했다. 교회에 갈 수 없게 된 박윤선 목사와 친구들은 평양 주변의 산으로 기도처를 옮겨서 새벽 4시부터 7시까지 기도를 했다. 박 목사는 기도할 때 주변에 있는 풀을 뜯는 버릇이 있었는데 몇 시간 기도하고 나면 풀이 다 뽑혀 손이 허전함을 느껴야 했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유학시절을 보낼 때도 박윤선 목사는 새벽이면 일어나서 몇 시간 기도한 뒤 학과를 준비하고 요한계시록을 암송했다. 박윤선 목사가 큰 소리로 기도했기 때문에 옆방에 있는 학생들은 매일 아침 그의 기도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고신, 총신, 합신에서 교수사역을 할 때도 그의 새벽기도 열심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는 “박윤선 목사님께서 총신(1979년)에 계실 때 6개월 동안 매일 새벽 택시를 타고 학교 뒷산으로 가셔서 2시간여 기도를 하셨다”면서 “나도 목사님을 흉내내어 2개월동안 새벽기도를 했다”고 회상했다. 김명혁 목사는 “박윤선 목사님의 기도는 영혼의 호흡과 같았으며 실로 쉬지 않고 기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택시를 타고 오면서도 ‘주여! 주여!’를 쉬지 않아서 택시기사가 박 목사님에게 술 취했느냐고 묻기도 했다”고 전했다.

정성구 목사(한국칼빈주의연구원)는 “박윤선 목사님을 자주 일대 일로 대면했는데 5분쯤 지나면 눈을 감고 입으로 중얼중얼하면서 기도하셨다”면서 “그러면 나는 얼른 눈치를 채고 방문을 나섰다”고 말했다. 정 목사는 “그만큼 박 목사님은 시간을 귀히 여기셨던 분이다. 박윤선 목사님의 <성경주석>도 무릎으로 썼다고 보면 된다”고 증언했다. 박윤선 목사를 아는 교수들은 그의 방을 지날 때면 으레 박 목사의 기도소리가 흘러나왔다고 말했다.

박윤선 목사에게 기도는 습관이요 생활이었다. 박 목사는 생전에 기도를 강조하는 말씀을 많이 했다. 그러나 왜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한 것은 상대적으로 적다. 아마도 그는 기도는 성도의 당연한 자세요, 목회자에게는 존재 자체와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박 목사가 생전에 기도에 전념했던 이유를 설명한 글이 있다.

“한 50여 년 전 일로서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숭실전문에 다닐 때 기도를 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산에도 가고 고요한 방에도 찾아가서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기도하려는 마음이 아주 강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나 무슨 일을 당하든지 기도하면 되지 하는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면 된다는 그러한 생각에 온통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 박윤선 목사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성경주석> 집필과 수많은 강의와 설교를 감당하면서도 그는 평생 새벽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그의 기도는 영혼의 호흡과 같았다. 기도하지 않고는 일하지 않았다. 사진은 박윤선 목사가 교회연합기관의 초청으로 신앙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사진제공=도서출판 영음사)

박윤선 목사가 기도에 힘썼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된다”는 강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박윤선 목사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새벽에 두시간여동안 기도하는 습관을 평생 유지했다. 산에 올라갈 만한 체력을 갖추지 못하게 됐을 때도 그의 기도 최우선주의는 변함이 없었다.

또 그의 기도는 <성경주석>과 설교 및 교수사역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고, 반대로 그의 기도 때문에 그는 <성경주석>과 설교 및 교수사역 외에 다른 데 눈을 돌릴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기도는 그의 사역의 영적인 원동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목표를 향해 매진하게 하는 경주마용 눈가리개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럼 박윤선 목사는 날마다 드리는 기도 시간에 어떤 내용을 하나님께 아뢰었을까? 혹시 우리네 범인들이 흔히 하는 바와 같이 자신과 가족의 건강 및 성공이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 박윤선 목사는 “참된 기도는 대체로 자아 중심의 기도가 아니라 남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백번 기도했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중심해서 기도한다면 거의 모든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는 기도입니다”라고 말했다.

박윤선 목사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기도를 많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는 것 외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의 생활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고 가족과의 외식이라든지 여행이라든지 하는 평범한 즐거움도 그의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박윤선 목사가 본 유일한 영화는 <십계>였고 즐겨보았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다큐멘터리류였다. 오직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갔던 박윤선 목사였기에 그의 등 뒤에는 가족이라는 그늘이 있었다. 가족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평가는 박윤선 목사 생애의 아킬레스건이었으며 동시에 그 역시 평범한 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박윤선 목사의 유언

마지막도 한국교회에 남겼다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에서 저자 서영일 박사는 “박윤선 목사의 생전의 관심과 마음 자세는 그가 죽기 전 1979년 3월에 작성한 유언장에 잘 나타나 있다”고 밝혔다. 박 목사는 주석의 발행에 따른 인세를 다음과 같이 분배할 것을 말했다. 그의 가족을 위해서는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10%는 학문성과 헌신이 뛰어난 학생을 위하여
10%는 너무 가난하여 공부할 수 없는 학생을 위하여
10%는 한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30%는 해외선교를 위하여
10%는 군 선교를 위하여
10%는 가난한 농촌목회자 자녀 교육을 위하여
10%는 나환자나 시각장애인과 같은 장애인을 위하여
10%는 고령의 신자들을 위하여

 한편 박윤선 목사의 4남 박성은 박사(의사)는 <내가 지켜본 아버님의 마지막 순간들>이라는 간병기에서 박 목사가 문병 온 자녀들에게 했던 권면의 말씀들을 소개했다. 그가 주로 한 유언들은 “진실하게 살라”, “남편을 즐겁게 하려하기 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더 힘쓰라”, “주님 제일주의로 살아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주를 사랑하라”와 같은 것들이었다. 실로 박윤선 목사다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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