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개혁주의 모델 박윤선 목사 ④목회자 교육

‘영적 지도자 되기 위해 긴 훈련 기간 통과하라’ 강조 … 신학교육과 제도개선 병행 노력

박윤선 목사는 일평생 한국교회의 참된 부흥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박 목사는 교회가 제대로 서 있기 위해서 목회자들이 바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 목사가 생각했던 참 목회자상은 경건과 학문을 갖춘 지도자였다. 박 목사는 가르침과 삶을 통해 경건과 학문성을 갖춘 목회자상을 퍼뜨리려고 노력했고 스스로 삶의 모범을 보였다.

박 목사가 생각한 참 목회자상의 으뜸되는 요소는 소명의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박윤선 목사는 “목회자가 되려면 스스로를 살펴보아 내적 외적 소명이 분명한가를 확인해야 한다”면서 “안수 받는 데 급급하지 말고 진정한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긴 훈련의 기간을 통과하라”고 말했다. 또 그는 “비록 목사가 되었더라도 목회의 능력이 없거나 은사가 발견되지 않으면 그만두어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그의 생애를 위선으로 보내게 될 것이요 후일 하나님으로부터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고 경고했다.

동시에 박 목사는 신학교육의 중요성을 여러번 강조했다. 현대 신학교가 물량주의에 빠져서 너무 많은 신학생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무자격 목사를 배출하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박 목사는 소수정예의 신학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했고, 교단의 세를 불리기 위해서 합동을 하는 것을 반대했다. 박 목사는 교단 합동을 하면 무자격 목회자들이 영입될 가능성이 많고, 목회자를 재교육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 생전에 주석집필을 하고 있는 박윤선 목사의 모습. 박 목사가 필생의 사명으로 알고 <성경주석> 20권을 완성한 것은 한국교회가 살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 누구보다 목회자가 말씀에 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박 목사는 강의와 설교, 제도개혁과 모범을 통해 바른 목회자상을 구현하려고 노력했다.(사진제공=도서출판 영음사)

박 목사가 생각한 목회자상의 두 번째는 실력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실력이 있어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힘있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학생은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공부하다가 죽을 정도로 열심을 내라고 가르쳤다. 목회자들에게도 성경을 연구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고 권면했다.

박 목사는 당위성만을 되풀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특정인이나 대상을 비판하지 않았으며 일반적인 현상을 지적한 경우에는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개혁적인 제도를 만들고 교육 현장에서 구현하려고 힘썼던 실천가였다. 신학교의 규모에 신경을 썼고 엄격한 학생 평가를 실시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매 학기 끝에 학생들에게 교수들을 평가할 기회를 주었다. 교수평가제를 국내 최초로 시행했던 것이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정창균 총장은 “박윤선 목사는 누구라도 예외없이 성적을 평가했다”면서 “한 시각장애인 학생이 있었는데 시험점수가 좋지 않게 나와서 선처를 여러번 호소했지만 거부하여 제 때 졸업을 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또 정 총장은 “박윤선 목사 생전에 모든 학생들은 한 학기에 두 번 교수들과 재학생들 앞에서 설교를 해야 했다”면서 “설교 후 평가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단상에 오르기 전에 학생들은 긴장에 긴장을 더해야 했다”고 말했다.

박윤선 목사는 목회자는 섬기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섬김을 위해 성경적인 목회를 해야 하며 그것은 성도를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박 목사는 목회자가 권위를 인정받아야 하지만 권위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고 여러차례 언급했다.

박 목사는 “이 시대에 많은 교역자들이 자기는 교회에서 구별된 특수층의 신분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처신하면서 그것이 습성화되고 풍토화되어 스스로 속고 있다”면서 “또한 이런 사상에 물든 교인들 역시 그 목사를 볼 때에는 어떤 상층급 신자로 생각하고 있으니 이 모두가 얼마나 성경을 위반하는 잘못인가!”라고 개탄했다.

박 목사는 목회자가 할 일은 목양에 있으며 목양에 전념을 하고 다른 사욕과 희락에 욕심을 내서는 안된다고 여겼으며 평생의 삶으로 신념을 실천했다. 그는 소명있는 자가 신학교에 진학해야 하고, 신학교는 그들을 철저하게 교육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한 사람이 목회자가 되어 목양에 전념을 할 때 교회는 부흥에 이른다고 생각했다. 반면 목회자 양성 과정에 문제가 있는 채 무자격 목회자들이 교회를 맡고, 실력과 진실함이 없기에 목회에 승부를 걸지 못하여 사리사욕에 빠지고 결국 삯군 목회자가 되므로 교회를 망친다고 생각했다. 박 목사는 자격없는 목회자를 퇴출시키기 위해서 매 3년마다 목회자 신임투표를 해야 한다는 선진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박 목사는 자신이 말한 바를 실천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성경을 연구했고, 주일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강단을 비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목양에만 전념했고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지나칠 정도로 오락을 즐기지 않았다. 그는 목회자는 성결해야 하며 성결은 돈, 명예, 이성을 멀리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박윤선 목사도 인간이었기에 완벽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박윤선 목사는 예장고신, 예장합동, 합신 교단에서 교수사역을 하면서 늘 정치적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윤선 목사를 비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란 힘들다. 바른 말을 했고 말한 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신행일치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정치에 침묵, 아쉬움 남겨

박윤선 목사의 정치관

거의 흠을 찾아볼 수 없는 박윤선 목사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정치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선 신사참배에 적극적으로 항거하지 않았다. 박 목사는 솔직하게 이 사실을 고백했다. 그는 봉천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성경과 나의 생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시대에 본국 교계는 신사참배 문제에 휘말려 심히 어지러운 국면에 놓여 있었고, 좀 새롭게 나아가려던 만주 교계에까지 그 신사참배의 바람이 불어와서 점점 어지러워졌다. 그러므로 나는 신사참배 문제와 타협하고 나아가는 교계에서 탈출하려고 기회를 찾았고, 조용한 곳에서 성경 주석 저술에만 전념하기로 작정하였다.”

또 박 목사는 “나도 단 한 번이지만 신사참배를 한 범과가 있으므로 나는 언제나 그 일로 인하여 원통함을 금할 수 없었다”면서 공적으로 회개한 바 있었다.

박 목사는 선진적인 생각을 가지고 이를 목회현장과 신학교육에 반영하려했던 목회자였다. 목회자 재신임, 교수평가, 여성 목회 뿐만 아니라 과학과 환경 등 각 분야에서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을 취했다. 심지어 기독교 노동단체가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회 개혁을 위해 취했던 행동과 비교할 때 정치 문제에 있어서는 실천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박윤선 목사는 우선 정치 자체를 싫어했다. 교회정치 분야에 대한 언급이었지만 “정치는 그저 나쁜 정도가 아니라 끔찍한 것이다”고 말했다.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서 31장 5항을 인용하여 정교분리를 주장했고 비상한 경우만 행정관에게 겸손한 청원을 할 수 있고 혹 행정관의 자문이 있으면 양심의 만족을 위하여 충고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박 목사는 교회는 정치에 참여하면 안 되고 교인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것은 향후 한국교회 보수교단의 정치관으로 자리잡았다.

물론 박 목사는 아무 정권이나 덮어놓고 찬양하지는 않았다. 그런 일을 하는 정치목사의 그룹에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 한국 근현대사의 희비애락 속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이었지만 정부와 사회에 대한 비판도 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 침묵은 잘못된 정권에 대한 암묵적 비판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박윤선 목사와 같은 지도자의 침묵은 보수교단 전체의 입장으로 여겨질 수 있었기에 아쉽다는 목소리도 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