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개혁사상 부흥운동 인사이트 (insight) 개혁주의 역사관 ②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역사의 고백과 증언

구속사적 이해와 언약신학은 사변의 결과 아닌,
성경을 대하는 태도와 인용 방식을 개혁한 결과

1. 새로운 역사관의 필요성

▲ 김요섭 교수
·총신신대원·역사신학
·개혁사상부흥특별위 전문위원

역사적 개혁주의가 물려준 성경적인 역사관은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그 고백에 따라 상황과 시대를 해석하는 관점이다. 이 땅 위에서 성화의 과정에 놓여있는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의롭다 여김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가 남아 있어 완전히 거룩하지 못하다.

불완전한 신자들이 갖는 가장 큰 실수는 내가 주인이며 하나님은 도와주시는 분이시며, 내 생각이 기준이고 성경은 참고자료에 불과하다는 착각이다. 이런 착각을 하는 개인들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 자신들의 공적을 자랑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착각은 더 고착되고 교만을 더 커진다. 착각과 교만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을 기준으로 삼는 개혁주의 역사관은 개인적 차원과 공동체적 차원 모두에 걸친 끊임없는 회개와 개혁을 요구한다.

2.‘오직 성경으로’의 역사 해석

개혁주의 역사관이 요구하는 지속적 개혁의 기준과 방법은 성경이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신구약 성경을 개혁의 기초라고 생각했을까?

사실 로마가톨릭도 인문주의자들도, 급진세력도 모두 성경의 권위를 부인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개혁주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의 성경이해는 공통적으로 성경의 역사를 주권자 하나님의 역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로마가톨릭은 성경을 자신들의 전통과 교령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취사선택했다. 인문주의자들은 성경을 그들의 지식과 인문학적 소양을 과시하고 전수하는 수사학과 언어학의 교안으로 이용했다. 급진세력은 성경에서 그들의 급진적 행동과 순수한 공동체를 정당화해 주는 사례집들을 찾아내려 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의 원리를 따라 순수하고 겸손한 태도로 성경 전체를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 했다. 그 결과 성경 전체가 명확하게 선포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역사가 선명히 보였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에게 은혜로 주신 구원의 언약대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대속의 제물로 삼아 우리의 의가 되게 하시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모든 믿는 자들의 영생의 보증이 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모든 민족에게 이 복음을 증거하시며 자신이 정하신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의 모든 역사를 종결하고 심판하실 것이다.

17세기 개혁교회의 신앙을 가장 완성된 형태로 정리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1647)의 1장 6조는 성경의 진리와 그 권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 인간의 구원, 신앙, 생명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거나 또는 선하고 필연적인 결론에 의해 성경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새로운 계시로든지 혹은 인간의 전통에 의해서든지 아무것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성경에 추가될 수 없다.”

개혁파의 성경관은 이처럼 구약과 신약 전체를 언약의 성취라는 구속사의 관점에서 통전적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구약 율법과 신약 복음의 어떤 불연속성을 주장했던 루터파와 달랐다. 세상과 교회를 두 왕국으로 나누기보다는 양 영역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역사 아래에서 쓰임 받는 기관이며 도구로 보았다는 점에서도 루터파와 차이를 가졌다. 개혁신학의 구속사적 이해와 언약신학은 사변의 결과가 아니라 성경을 대하는 태도와 성경을 인용하는 방식을 꾸준히 회개하고 개혁한 결과였다.

3. 개혁된 관점과 그 고백의 유산

종교개혁시대 각 나라의 개혁교회들은 프랑스 개혁교회의 <갈리아 신앙고백>(1559),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 저지대지방 개혁교회의 <벨기에 신앙고백>(1560) 등 핍박과 혼란 속에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고백하고 확인해야 할 공통의 신앙을 선언했다. 바른 신앙을 전수하기 위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과 같은 신앙교육서들이 나타났고, 교회 안의 신학적 논란을 정리하기 위해 <도르트 신조>(1619)와 같은 기준들이 세워졌다. 그러나 다양한 표준문서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 성경의 유일한 진리 위에서 자신과 시대를 해석하려 한 개혁주의 역사관을 고백했다.

그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잉글랜드의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서 발생한 내전 상황에서 작성되었다. 스튜어트 왕실의 국교회주의에 맞서 새로운 교회 제도와 그 신학적 기초를 제시하려 한 의회의 요청에 따라 경건한 청교도들이 잉글랜드 왕의 즉위식이 열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함께 모였다. 그들은 한낱 인간에 불과한 왕이나 어떤 권력자가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교회의 머리로서 친히 통치하시는 교회와 사회를 세우려 했다.(25장 6조)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에 신실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백성들과 교회를 말씀으로 통치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조항들은 전쟁까지 벌어진 당대의 도전과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오직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최고의 재판장이 되셔서 모든 논쟁과 모든 상황과 시대를 판단하신다”고 고백했다.(1장 10조) 신앙고백의 각 조항들은 추상적 사변의 결과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하고 철저한 성경해석의 결과였다. 웨스트민스터의 신학자들은 각 조항이 불러올 정치적·사회적 결과에 대해 토론한 것이 아니라 과연 이 고백이 얼마나 성경 본문에 충실한 것인지 오래토록 치열하게 토론했다.

그러나 영국 내전의 결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기대와 달랐다. 전쟁에서 승리한 의회파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아닌 크롬웰의 종교 독재를 선택했다. 크롬웰은 찰스1세를 참수한 이후 잉글랜드 교회와 사회를 성경을 따라 새롭게 한다는 명분아래 스스로 신앙과 국가의  수호자가 되어 폭압적 독재를 시행했다. 독재에 반발한 국민들은 결국 프랑스로 망명했던 찰스1세의 아들 찰스2세를 복귀시켰고, 새로운 군주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이전보다 더 강경하게 국왕중심의 국가교회제도를 강요했다. 예배와 교회제도 문제에 있어 왕이 아닌 그리스도의 통치를 원했던 수많은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인들이 박해를 받았고 신대륙으로 추방당하거나 목숨을 잃었다.

잉글랜드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성공과 실패는 권력 쟁취나 양적 팽창, 혹은 그 어떤 사회적 영향력 확대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말하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대한 고백이 그들의 역사관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날을 정하신 목적은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영원한 구원에서 그 분의 자비로우신 영광을 나타내시고, 악하고 불순종하는 버려두신 자들의 영벌에서 그 분의 공의로우신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그때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고, 주 앞에서 나오는 충만한 즐거움과 유쾌함을 경험할 것이다.”(33장 2조)

그들은 이 약속을 붙잡고 대서양의 풍랑 속에서, 신대륙의 척박한 땅 위에서, 그리고 감옥과 죽음의 자리에서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했다. 적은 무리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믿고 고백하고 삶으로 증언했다. 믿음으로 살았으며 믿음으로 죽었던 이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했다.(히 10:38)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한 구원의 은혜를 역사의 주제라고 믿었던 이 신실한 자녀들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셔서 계속 새로운 세대를 일으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 성경처럼 위대한 영웅이 아닌 신실한 신자들을 통해 새로운 지역, 새로운 나라에서 또 다른 세대가 일어나 성경의 진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이 전해들은 성경의 진리와 목격한 고백의 삶을 따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선택했다.

4. 무엇을 남기려 하는가?

16세기 종교개혁시대를 거쳐 17세기 정통주의시대 개혁교회가 확립한 ‘개혁’된 역사관은 나 중심의 인지상정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앞에서 자기 자신과 이 시대를 해석하는 시각의 개혁이었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한 개혁교회의 선조들의 위대함을 기념하지만, 사실 그들은 위대한 그들의 신학적 업적이나 영향력 확보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선포되고 전해는 것으로 만족했다. 내가 주인이 아니며 우리의 판단이 기준이 아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완전하게 계시된 성경을 기준으로 삼을 때 끊임없는 회개와 개혁된 성경적 역사관을 바르게 증거하고 전수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첫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익숙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이 첫 조항이 역사적 개혁주의가 전해 준 성경적 역사관의 기초와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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