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개혁사상 부흥운동 인사이트] ③하나님의 뜻이 새롭게 확인되는 개혁주의 부흥

그리스도 복음의 역사를 자아실현 수단으로 이용하는 몸부림에 개혁주의 이름 붙일 수 없어

 

개혁주의 부흥, 그 필요성

▲ 김요섭 교수·총신신대원·역사신학·개혁사상부흥특별위 전문위원

20세기 초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인간의 멈추지 않는 진보에 대한 근대(modernism)의 이상은 심각한 도전에 부딪혔다. 과연 인간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사건들을 다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인 해석 체계를 세워 계속 진보할 것인가? 아니면 근대과학과 산업이 만들어낸 대량살상 무기로 인해 멸종할 것인가? 진보보다 일단 존속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으로부터 근대주의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나름대로 의미와 진리체계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탈근대주의(postmodernism)가 등장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십 년 동안 외쳐 온 21세기 인류는 이제까지 진행된 해체도 다시 해체해야 하는 혼란에 처해있다.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 가운데 역사적 개혁주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부흥’이라는 용어에서 어떤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용어는 교파와 교단을 망라해 여전히 한국교회 안에서 통용되고 있으며, 그 성경적 의미가 개혁주의가 표방하는 개혁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개혁주의는 오늘 어떤 부흥을 이야기해야 하며, 어떻게 그 부흥을 이루려 해야 하는가?

 

성경의 부흥

역사적 개혁주의는 성경을 유일한 최고의 권위로 삼았던 종교개혁의 역사를 계승하기 때문에 부흥의 의미와 방법에 대해서도 성경과 더불어 역사의 교훈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구약에서는 하박국 3장 2절에서 ‘부흥’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부패와 타락을 해결해 달라는 기도에 바벨론을 통한 심판을 하나님께서 응답으로 주시자 하박국은 다시 간구했다. 항의에 가까운 두 번째 간구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갖고 계신 심판주의 권능을 선언하시며, “그 앞에서 잠잠”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박국이 언급한 부흥은 역사의 주권자 여호와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드린 기도의 첫 마디였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부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야’는 “새롭게 하다(renew)” “다시 살리다(revive)”라는 의미이다. 즉, 구약이 말하는 부흥은 진보나 팽창이 아니라 회복이었다. 무엇을 회복시켜 달라는 간구인가? 이스라엘 민족의 중흥이나 유대 종교의 갱신이 아니다. ‘주의 일’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을 덮고 그의 찬송이 온 세계에 가득”해지는 회복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할 진정한 회복의 대의 앞에 모든 것은 배경이요 방편일 뿐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다시 바벨탑을 쌓았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온갖 잡족들을 모아 조성하신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유대 종교는 구원 언약의 성취이신 독생자께서 오신 이후에는 전면 폐기될 실상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선지자 하박국 자신 역시 하나님의 신실한 구원 역사 가운데 잠시 한 자리를 맡아 3장 분량의 묵시를 받아 남기기 위해 쓰임 받은 무익한 종에 불과했다. 이렇게 역사를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와 시대 상황을 재발견할 때 부흥을 간구할 수 있다.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들 듯이 인간의 모든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시간의 심연으로 사라진다. 오직 우리 주의 말씀만 영원히 선다.(사 40:8)

신약의 부흥 역시 다르지 않다. 대표적으로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부흥 역시 하나님의 뜻,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구원의 역사를 더 선명하고 더 광범위하게 재확인한 사건이었다. 그날 이후 나타난 방언을 비롯한 놀라운 기적과 이적의 출현이 부흥의 주제가 아니다. 몇 번의 설교로 3000명, 5000명이 회개한 놀라운 교회 성장도 부흥의 주제가 아니다. 성령의 권능은 제자들을 완전히 바꾸었다. 회복될 이스라엘 왕국에서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을 노렸던 제자들이 비로소 사람을 낚는 어부, 그 분의 양을 먹이는 사역자로 변화되었다.

제자들은 구원의 복음을 들고 예수님이 남기신 단 하나의 명령에 순종했다. 유리하고 편리한 곳이 아니라 어느 곳이건 복음이 필요한 곳을 찾아갔다. 자신의 이름을 슬쩍 끼워 넣어 가문의 명예를 세우려 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자신들의 경험과 인문학적 소양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했다. 신약이 보여주는 진정한 부흥 역시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의 복음이 더 선명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되는 언약의 성취였다.

 

역사 속의 부흥

성경적 부흥은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나타났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다시 선명하게 재조명했다. 18~19세기 북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차례 대각성운동은 신대륙 이민자들에게 그들을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주목하게 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사실상 나라가 망해버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 민족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순전하게 바라보게 해 주었다. 이 세 번의 대표적인 부흥 가운데 개혁교회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카이퍼가 잘 지적했듯이 종교개혁 이후 칼빈주의는 중세 교황의 통치권을 세속권력이나 또 다른 교권 혹은 인간의 기본권으로 대체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적인 통치로 대체하려 했다. 신대륙의 개혁교회는 신비체험이나 감정에 매몰되는 주관주의가 아니라 죄인의 회개,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변화를 추동했다. 1907년 부흥운동은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이 부흥 이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자녀들의 간구에 응답하셔서 긍휼을 베푸셨다. 종교개혁자들의 헌신을 받으셔서 개혁교회를 새롭게 세우셨다. 대각성운동의 간구를 받으셔서 합리주의적 근대정신 위에 세워진 미국의 교회들이 세계 각국에 선교사를 보낼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일제 강점기와 민족상잔과 군사 독재의 굴곡을 견디게 하시고 이 땅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셨다.

칼빈주의자들 역시 역사와 시대 속에서 새로운 복음의 부흥을 꿈꾸었다. 인본주의와 산업발전에 근거한 근대주의가 세계를 석권해 나가던 20세기 초, 카이퍼는 위대한 칼빈주의가 근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칼빈주의는 삶의 포괄적 체계로서 종교, 정치, 학문, 예술 등 전 영역에 걸쳐 전 세계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칼빈주의의 ‘근본 사상’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사람은 수단과 방법이며 하나님만이 목적과 출발점이며 도착점이며, 물이 흘러나오는 근원인 동시에 물이 결국 돌아가는 대양이다.” 카이퍼는 이 근본정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칼빈주의가 늘 취해왔던 행동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행동은 지배와 정복이 아니라 교회와 정부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스스로의 권한을 제한하고 권력을 분할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모든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서 생긴다는 신앙고백이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부흥을 사모하는 태도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이 간구했던 긍휼은 주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선민들은 포로가 되어 끌려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어야 했다.(시 137:1) 오순절 사건의 결과도 그렇다. 사도들이 생명을 바쳐 세운 초기 교회들은 지금은 대부분 돌무더기가 되었고, 그 지역은 지금도 이슬람 치하에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카이퍼가 말했던 칼빈주의를 통한 인류의 각성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손꼽은 위대한 개혁주의적 국가인 네덜란드와 영국과 미국은 지난 100년 서구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들 나라 교회들이 부지불식간에 제국주의에 편승했던 발자취들은 지금도 세계선교와 평화에 지장을 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21세기 이 칼빈주의 위에 세워진 국가들의 문화와 정책은 적어도 동성애 문제에 있어서는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탈근대주의를 따르는 데 앞장서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전혀 닮은 점이 없고, 카이퍼가 기대하지 못했을 법한 자국 이익 중심의 배타주의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역사가 이렇게 흘러갔다고 해도 복음의 부흥은 실패하지 않았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해지는 진정한 부흥(하 2:14)은 이스라엘 민족이나 위대한 개혁교회 혹은 개혁주의 문화의 새로운 번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되는 하나님 언약의 역사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담대하게 마케도니아를 향했다. 2000년 뒤 자신들의 이름을 기념해 줄 한국교회의 위대한 성장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다만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그가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보았다.(히 11:6)

풀과 같은 인생이 역사의 모든 과정을 다 알 수 없다. 다만 진노 중에라도 베푸시는 긍휼을 구할 뿐이다. 그리고 성도는 이 간구의 끝에서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신 긍휼보다 더 근본적이며 위대한 긍휼이 없음을 발견한다. 지금 다시 이 ‘부흥’이 필요하다. 오늘 우리의 포스트모던 시대는 소위 4차 산업혁명을 통해 더 이상 이름 붙이기도 힘든 새로운 시대로 흘러가겠지만 역사의 주권자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변함없이 지금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역사관은 나의 성공, 우리의 번영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려는 창조의 목적, 인생의 최고의 소명을 다시 확인하고 회복하는 부흥을 소망한다. 이와 같은 생각이 너무 소극적이고 추상적으로 느껴지는가? 좀 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부흥이 더 나아 보이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또 다른 어떤 목적과 포괄적으로 병행해 놓거나,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사를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몸부림에 ‘개혁주의’의 이름을 붙여줄 수는 없다.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하면 더 하여 주실 이 모든 것”조차 망각하고 오직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허락해 주시는 회복이 개혁주의가 추구해야 할 부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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