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의 시선-영화 <파라다이스>

제국주의 팽창의 결과로 촉발된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후 유럽은 내셔널리즘을 한층 강화한 형태의 파시즘과 나치즘에 현혹되었고 러시아에서는 코뮤니즘이 대중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저마다의 파라다이스를 꿈꾸었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은 그곳에 없었음을 후대의 우리들은 알고 있다. 제7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에 빛나는, 러시아의 거장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감독의 <파라다이스>는 그 시대를 배경으로 진정한 구원의 의미를 찾아 나선다.

1940년대 말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극에 달할 무렵, 레지스탕스에 합류한 러시아 출신 <보그> 편집장 올가와, 변호사를 아버지로 둔 덕에 프랑스에서 경찰 공무원으로 특권층의 생활을 즐기는 쥘, 독일 귀족가문 출신의 나치 친위대 SS 장교 헬무트는 어딘지 모를 장소에서 수의를 입은 채 누군가로부터 취조를 당한다. 이때 이들을 비추는 화면은 마치 슈퍼 8미리 가정용 카메라와 같은 질감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이들은 그들을 취조하는 대상과 관객에게 끊임없이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교차하며 이야기한다.

영화 <파라다이스>는 각각 자라온 환경과 나라가 다른 이 세 인물들이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 사건으로 인해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부역자로 엮인 시대적 상황을 관통한다. 그러나 콘찰로프스키 감독이 이들의 이야기를 훑어내며 담아낸 카메라는 홀로코스트 사건 자체보다는 이를 소재로 각자가 추구하고자 했던 그들만의 낙원에 초점을 맞춘다. 파리의 고위직 경찰 공무원 쥘은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한 시기에 그들의 편에 서서 유대인 색출 작업과 레지스탕스를 잡아들이는 일에 편승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아들과 아내를 지키며 이 편한 낙원에서 사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마치 일제 강점기 때에 대부분의 지식인 부역자들이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가 영원할거라 믿고 대동아전쟁을 선전 선동한 것과 같다.

올가는 옆집에 사는 유대인 아이들을 숨겨줬다가 발각돼 쥘에게 잡혀 유대인 학살 수용 캠프로 보내진다. 헬무트는 체호프를 가슴 깊이 동경하며 이상주의 사회를 꿈꾸는 청년이었지만 그 앞에 나타난 히틀러에 매료돼, 나치장교로 유대인을 학살하는 것이 유럽에서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 믿게 된다. 곧 나치의 패망이 임박할 무렵 그의 믿음이 허구였음을 깨닫기 시작할 때, 한 때의 연인 올가를 수용소에서 재회한다. 올가 또한 그녀를 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 있게 한 장본인인 두 유대인 아이를 그 곳에서 만난다. 각자들은 이상을 추구하지만 현실은 이를 외면한다. 오히려 이상과 동떨어진 선택을 하게 한다.

현실의 악은 철저히 인간에게 기생하여 잘못된 선택으로 몰고 간다. 이를 이겨내는 것은 결국 주님을 경외하여 대상을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뿐이라고 콘찰로프스키 감독은 올가를 통해서 말한다. 이때 한 줌의 사랑이 흘러나와 거대한 악을 녹여 버린다. 기적이다. 올가와 쥘, 헬무트가 취조실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각자의 모국어인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로 말한다. 감독은 실제 프랑스, 러시아, 독일 배우를 캐스팅하여 이들의 이야기에 사실감을 불어 넣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관객에게 전달함으로써 보편성을 부여한다. 현재 세상에서 자유와 권리라는 명분으로 벌어지는 전쟁과 테러가 그때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곧 인간의 악을 이겨내는 힘은 주님의 아가페 긍휼이라고 말한다.

구원과 긍휼의 시선이 담겨 있는 이 작품은 오는 4월 20일부터 25일까지 열리는 제14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에서 국내 처음으로 상영하는데, 유럽 영화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최근 보기 드문 충격적인 반전의 울림을 관객에게 선사할 것이다. 신촌에 위치한 필름포럼에서 만나 볼 수 있다.
<필름포럼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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