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개혁주의 설교 ② ‘보는 예배’에서 ‘듣는 예배’로:칼빈과 설교

종교 개혁은 예배의 개혁 … 설교가 온전하지 않으면 성도는 올바로 자랄 수 없어
설교자는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가 아닌 가장 귀하게 받은 ‘말씀’ 온전히 선포해야



 
▲ 문병호 교수(총신대·조직신학)

1. 말씀의 순수한 선포: 교회의 첫 번째 표지(標識)
 
칼빈은 에베소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복음이 설교되고 우리가 함께 가르침 받기 위해서 모일 때 이것은 인간이 고안한 정책이거나 질서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인간의 환상이거나 발명품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포고(布告)이며, 어떤 경우이든 우리가 거역할 수 없는 영구적인 법입니다.”

설교의 존재는 말씀의 존재와 그 궤를 같이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말씀으로 말미암으므로(롬 10:17), 말씀과 들음 사이의 전달의 도구로서 설교자, 그 전달로서 설교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종교 개혁은 예배의 개혁이었다. 예배의 지향점이 ‘보는 예배(cultus visus)’로부터 ‘듣는 예배(cultus auditus)’로 바뀌게 되었다. 자신의 입술을 여셔서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설교가 예배의 중심으로 여겨졌다. 하나님의 대언자인 목사의 설교를 통한 말씀의 선포가 성례의 거행 및 권징과 함께 교회의 표지로서 인식되었다. 설교가 온전하지 않으면 은혜의 방편인 말씀의 역사도 온전하지 않아 성도는 기갈에 허덕여 올바로 자라갈 수 없게 된다.

데살로니가교회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칭찬받을 수 있었던 것은(살전 1:3) 그들이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이다(살전 2:13). 데살로니가교회는 처음부터 박해를 심히 받았으나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하고 뜻을 풀어 가르치는데 진력하니 헬라인의 큰 무리와 귀부인도 믿게 되었다(행 17:2-4). 교회의 서고 넘어짐이 교리의 서고 넘어짐에 있다고 할진대, 교회가 생기가 돌고 살이 붙고 주님의 큰 군대를 이루려면(겔 37:5-6, 10)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를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심중에 깊이 새겨야 한다. 하나님은 설교자를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들려주심으로써 큰 일을 이루신다. 말씀을 맡은 자들은 에스겔에게 임한 주님의 음성을 날마다 새기고 이를 대언해야 한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겔 37:4) 담대히 외쳐야 한다.
 
2. 설교자 칼빈
 
칼빈은 설교학 교수가 아니었으며, 설교학에 관한 책을 쓴 적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서 바람직한 설교자의 상이 어떠해야 하며 순수한 말씀의 선포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칼빈은 모범적인 설교자였다. 칼빈은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설교자가 설교 본문을 어떻게 정할 것이며, 어떻게 나눌 것이며, 어떻게 주해할 것이며,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전형을 보여주었다.

칼빈의 설교 사역은 인생의 마지막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설교와 주석을 병행했다. 일 년에 평균 200회 설교 및 말씀에 대한 강론을 하였다. 주일에는 두 번 설교하였으며, 격주로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는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으며 원고나 메모가 없이 행해졌다.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강해 설교자였다. 그의 설교는 방대한 분량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 신명기 설교는 200편, 에스겔 설교는 174편, 사도행전 설교는 189편에 이른다. 그는 1549년에서부터 1564년까지 간단(間斷)없이 시편,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미가, 스바냐,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다니엘, 에스겔,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 디모데전서와 후서, 디도서, 고린도전서와 후서, 욥기, 신명기, 이사야,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 사도행전, 창세기, 사사기, 사무엘상과 하, 열왕기상과 하를 설교했다. 이 가운데 구약은 주중 아침에, 신약은 주일 오전과 오후에 전했다. 주일 오후에는 시편을 이어서 증거하기도 하였다. 칼빈의 설교는 그의 생전과 사후 오래지 않은 기간 동안 영어, 독일어, 불어, 화란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오늘날 현대 영어로 번역된 거의 대부분의 설교들이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칼빈은 설교의 문체와 방식에 있어서 ‘간결성(brevitas, brevity)’과 ‘유용성(facilitas, facility)’을 추구하였다. 칼빈은 헬라어와 히브리어 성경으로 본문을 읽은 후 간단한 개요를 소개하고 설교를 시작하였다. 종종 본문의 주제를 먼저 개괄하고 난 후에 한 구절씩 강론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체로 성경 본문의 순서에 충실히 따르면서 설교하였다. 많은 은유들과 비유들이 사용되었으나 대체로 성경에 직접적인 교훈이 되는 긴요한 것들에 한정되었다. 그가 원고 없이 설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석과 강의를 통하여서 충분히 신학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본문의 의의와 가치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구체적인 성도의 삶에 적용하는데 뛰어남을 보였다. 이는 그가 일찍이 법학을 공부하면서 익힌 텍스트 안에서 텍스트 읽기(reading ‘text in text’)와 콘텍스트 곧 문맥 안에서 텍스트 읽기(reading ‘text in context’)에 능수능란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즉시 필사되어 바로 출판되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체계적이고 정치(精緻)하였다.

칼빈의 설교는 문체의 화려함과 수사(修辭)의 다양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고 유용했던 것은, 본문의 문자적, 역사적, 신학적 의의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충분히 새겨서, 부요한 지식 가운데, 말씀을 은혜롭게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칼빈의 설교는 교리적이자 강해적이었으며, 원리적이자 실천적이었고, 엄밀함 가운데 큰 감동을 자아냈다.
 
3. 설교자가 힘써야 할 세 가지
 
기독교 강요에서 볼 수 있듯이, 칼빈의 신학은 교훈적이며 고백적이며 변증적이었다. 교훈적이라 함은 성경의 진리가 그 속에 녹아있음이요, 고백적이라 함은 그것이 성경의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새기는 성령의 감동의 기록이라는 점이요, 변증적이라 함은 참 신학에 대한 진정한 항변이 그 속에 채워져 있음이다. 칼빈은 올바른 설교는 이러한 세 가지 요소를 다 포함하는 종합 예술과 같아야 한다고 여겼다. 설교를 통하여 진리를 가르쳐야 하며, 그 진리에 대한 고백과 그 진리에 따른 삶에 이르는 감화가 있어야 하며, 진위정사(眞僞正邪)를 올바로 분별하여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자리에 서게 해야 한다.
칼빈을 통하여 우리는 설교자가 마땅히 힘써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첫째, 설교자는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한다. 유일하신 교사이시며 원(原) 선포자시며 전파자이신(마 4:23)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고, 그 들은 것을 선포해야 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먼저 들어야 입이 열린다. “귀가 열리고” 난 후에야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진다(막 7:35). 올바로 들어야 올바로 전할 수 있다.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선포할 수 있다(벧전 4:11).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의 학교, 성령의 학교,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먼저 배워야 한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는 먼저 자신이 그 말씀에 감동되어야 한다. 칼빈은 디모데후서 3:16을 설교하며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저는 성경을 설명할 때마다 항상 다음을 저의 원칙으로 삼습니다. 저의 말씀을 듣는 사람마다 제가 제시한 가르침으로 유익을 얻고 구원에 이르는 덕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그러한 감동을 스스로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저는 저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위하여 덕을 세우는데 실패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한 불경스러운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설교자는 말씀을 선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가르쳐야 한다. 배우지 않는 자는 가르칠 수 없다. 전하고자 하는 자는 많으나 배우고자 하는 자는 적다. 배움의 즐거움을 모르는 자는 배움의 즐거움을 가르쳐줄 수 없다. 칼빈은 욥기를 설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강단에 오를 때 그것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제가 몸을 도사리고 강단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저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은 여러분과 함께 제 자신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에게 저주가 있을 것입니다.”

셋째, 설교자는 설교를 작성하고 전하는 전 과정에 있어서 기도해야 한다. 설교자의 설교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의 삶 속에 생명의 양식과 생수로 임하게 된다. 하나님은 부족한 사람들을 설교자들로 사용하심으로써 성도들에게 겸손의 도를 배우게 하신다. 설교는 설교자의 자질이나 수준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따라서 내적인 감화를 일으킨다. 설교는 설교자의 주관적 사변이나 체험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말씀의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다. 동일한 진리가 다양한 저자들에 의해서 유기적으로 영감되어 기록되었듯이, 동일한 진리가 다양한 설교자들에 의해서 선포되어 성도들에게 유기적으로 감화된다. 그리하여 말씀의 진리가 이른 비와 늦은 비와 같이 내려 심령을 적시게 된다. 설교자가 기도하지 않고는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고는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히 4:12)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에 깊이 새겨지는 말씀을 전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교한다.

“말씀은 지극한 능력으로 역사하여 선택된 사람들이 자기 지식으로부터 깨어져서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은혜 속으로 도망치게 한다. 말씀이 그들의 심령의 깊은 곳으로 스며들지 않는다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4. 주요한 과제: 강단의 회복
 
설교자는 자신이 먼저 감화를 받지 않은 말씀으로 회중을 감화시킬 수 없다. 설교자는 자신이 가장 귀하게 받은 것을 성도들에게 선포해야 한다. 설교자는 개인적이거나 주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며 시들지 않고 마르지 않는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벧전 1:23). 설교자는 “배우고 확신한 일”을 선포해야 한다(딤후 3:14). 교회는 ‘선포하는 교회(preaching church)’이자 ‘가르치는 교회(teaching church)’가 되어야 한다. 주중에는 가르치고 주일에는 선포해야 한다. 주중에 말씀을 배우지 않으니, 주일에 선포되는 말씀을 두고 어렵다고 한탄한다. 그러하니, 설교가 ‘말씀’이 아니라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가 되어간다.

한국 교회는 현재 강단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설교자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것을 전하지 않고 오히려 받지 않은 것을 성도들에게 맞추어서, 이성적으로, 세속적으로 전하는데 있다. 사도행전은 설교행전이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말씀의 선포로부터 비롯되었다. 베드로의 “말을 받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니 삼천이나 되었다(행 2:41). 사도 베드로가 구약의 말씀을(욜 2:28-32; 시 16:8-11; 110:1) 정확히 인용하면서 설교하니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었다.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의 수가 더하는데 있다(행 2:14-47). 우리가 모두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진리를 땅 끝까지 전하여야 한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겔 2:5, 7; 3:11),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피를 토하듯이 전해야 한다.
영원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립니다(Soli Deo gloria in aetern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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