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회자립지원제도 이렇게 진행된다 (2)공교회성을 회복하자②

인류 공동체 보편적 연대성 아울러 교회 공동체 영적 연대성 관점서 해결 모색 중요
안으로는 구체적 형제사랑 모범 실천, 밖으로는 교단의 사회적 신뢰회복 계기될 것


개혁주의 교회관 관점에서 본 미자립교회 지원

이상원 교수
총신신대원·기독교윤리
“교단 내부적으로는 평신도들에게 형제사랑의 구체적인 모범을 보여 줌으로써 무너진 영적이고 도덕적인 지도력을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이며, 외부적으로는 정통신학을 정통적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교단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교단에 소속된 교회들 가운데 30% 가량이 미자립교회로 분류되고 있다. 미자립교회 문제의 핵심은 단연 교역자들의 생활비 문제다. 7년에 걸친 힘든 고등교육과정을 마친 고등인력으로서,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까지 키우면서, 성도들의 영적인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는 교역자들에게 한 달에 100만원 위아래 수준의 사례금으로 생활하도록 요구한다는 것은 이들을 우리 사회의 최빈계층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며, 경제적 궁핍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존감에도 많은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이런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사역지를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목양의 터전으로 생각하고 헌신하는 무명의 교역자들이 우리 교단의 허리를 떠받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우리의 동역자들과 이들이 섬기는 약한 교회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할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들의 공동체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바라보시고 하나님이 해석하는 관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규범적 모델이 된다. 하나님이 인간들의 공동체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들 가운데 중요한 것이 연대성(solidarity)의 관점이다. 하나님이 연대성의 관점에서 인간 공동체를 바라보고 해석하신다면 마땅히 우리도 같은 관점에서 인간 공동체를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하며 그 관점에서 모든 문제들을 풀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인류 공동체를 보편적 연대성의 관점에서 바라보시는 동시에 교회 공동체를 특수한 영적인 연대성의 관점에서 바라보신다.

인류 공동체 보편적 연대성 
 

먼저 인류 공동체를 연대성 안에서 바라보고 해석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첫째, 창세기 4장 9절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찾아 오셔서 이렇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질문 안에는 아벨의 안위는 가인이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은 한 혈통을 나눈 가족으로서 서로의 안위를 돌보아야 할 연대성 안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셨다. 가인은 후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계열을 대표하고 아벨은 하나님을 믿는 계열을 대표하므로, 이 질문은 온 인류가 연대성 안에 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온 인류는 한 혈통 안에 있는 하나의 가족과도 같은 것이다(행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그런데 이 질문을 받은 가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인은 아벨의 안위는 자기의 관심사항이 아니라고 답변함으로써 아벨과의 연대성을 거부했다. 아벨의 안위는 아벨 자신이 돌보는 것이고 가인 자신의 안위는 가인 자신이 돌보면 된다는 것이다. 가인의 관점은 개인주의였다. 아벨과의 연대성을 인식할 것을 요구하신 하나님의 요구를 거부하고 개인주의의 길을 선택하자 가인은 믿는 계열로부터 퇴출당했다. 향후 연대성은 믿는 사람들이 인류 공동체를 보는 관점이 된 반면, 개인주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인류 공동체를 보는 관점이 되었다. 인류를 연대성의 관점에서 볼 때 비로소 아담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온 인류에게 물으시는 원죄의 전가론(롬 5:12∼21)이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담을 보실 때 아담과 한 혈통을 나눈 온 인류를 연대관계 안에 있는 하나의 가족으로 보셨던 것이다.

▲ 단순히 구제 차원에서 농어촌 미자립교회를 돕기 보다 공교회성 회복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사진은 수원 송원교회(윤상원 목사)가 농촌교회를 찾아 미용 봉사를 하는 장면.

둘째, 현대과학이 발달하면서 개인주의적 관점보다는 연대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인류 공동체의 특성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유전학의 관점에서 보면 나의 유전자는 변이와 염색체 배열상의 변화를 겪긴 하지만 100%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부모는 조부모로부터 100% 물려받은 것이다. 이렇게 추적해 올라가면 결국 온 인류는 아담 한 사람의 유전자가 복제된 것을 물려받은 셈이 되므로 온 인류는 하나로 연결된다. 현대의 발달된 인터넷, 교통, 통신수단은 온 인류를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묶어 준다. 현대인은 클릭 한 번으로 순식간에 수조원대의 자금을 국경을 넘어 이동시킬 수 있으며,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나라의 경제를 살리거나 죽일 수 있으며, 온 인류를 핵무기로 파멸시킬 수도 있다.

온 인류를 연대성 안에서 파악할 때 남아메리카의 불신자가 우리가 책임져야 할 선교대상이 되고, 아프리카의 난민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우리의 이웃이 된다. 인류 연대성의 관점에서 볼 때 한 교단 안에 있는 미자립교회 교역자들의 경제적 안위 문제는 당연히 우리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교회 공동체 영적 연대성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더욱 강력하고 영원히 계속되는 연대성이 있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 내의 연대성이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 보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 본문에서 말하는 몸은 교회 공동체를 말한다. 이 교회 공동체가 유형교회를 가리키느냐, 무형교회를 가리키느냐, 아니면 유기적 교회를 가리키느냐 아니면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가리키느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유형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 안에 무형적이고 유기적인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무형적이고 유기적인 교회는 시간과 영원을 관통하여 우주적 차원으로 펼쳐져 있는 하나의 통일된 보편교회다. 무형적인 유기적인 교회는 유형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가 지향해야 할 규범적인 교회상을 지시한다. 그 규범적인 교회 상들 가운데 하나가 교회를 한 몸 안에 있는 지체들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미 하나의 몸이 되어 있는 무형적이고 유기적인 교회는 유형적인 조직체가 그 자체를 다양한 지체들로 구성된 한 몸으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여기서 말하는 유형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매우 탄력 있게 해석될 수 있다. 하나의 지교회를 몸으로 보고 그 지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지체들로 볼 수도 있고, 하나의 교단을 몸으로 보고 그 교단에 속한 지교회들을 지체들로 볼 수도 있고, 전 세계의 교회를 몸으로 보고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건실한 교단들을 지체들로 볼 수도 있다.

교회 공동체를 한 몸 안에 있는 지체로 본다는 것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들을 지니는데, 그 중에 특히 고린도전서 12장이 강조하는 두 가지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지체로 번역된 ‘멜레’(μελη)라는 단어는 회원 정도의 의미를 지닌 멤버(member)로 번역해서는 그 본 뜻이 왜곡될 수 있다. 이 단어는 ‘사지’(四肢)라고 번역할 때 그 본 뜻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지는 말 그대로 두 팔과 두 다리다. 몸체와 팔과 다리-팔과 다리뿐만 아니라 온 몸의 모든 장기들-는 피, 림프액, 신경망, 경락(經絡) 등에 의하여 치밀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나눌 수가 없다. 몸과 지체의 비유는 매우 강력한 비유다. 몸통과 팔다리는 사실상 하나다. 지체가 아프다는 개념을 다리가 부러져서 걸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생각해 보라. 온 몸 자체가 치열한 아픔을 느끼지 않는가? 지체가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으로 생각해 보라.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사회에서는 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갈 정도의 문제가 생기면 사실상 사람 자체가 죽었다. 지체의 개념을 이런 강도로 생각해야 고린도전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확히 전달된다. 바로 이런 강도를 가지고 교단은 한 지교회의 고통을 교단 전체의 고통으로 생각해야 하고 넉넉한 대형교회는 미자립교회의 고통을 대형교회 자체의 고통으로 인식해야 한다.

둘째, 고린도전서 12장 22절에서 24절은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기 때문에,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고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지만,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여성들의 화장술을 묘사한 것이다. 여성들이 화장을 할 때 자신 있는 부위는 있는 그대로 드러나도록 내버려 두고 자신이 없고 결함이 있는 부분은 훨씬 더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처리한다. 이처럼 교회 공동체에 속한 지체들 중에서 강한 부분은 알아서 행동하도록 자유롭게 놓아두어도 되는 반면에, 약하고 소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은 훨씬 더 세심하게 돌보아야 한다. 미자립교회는 교단 안에서 자칫 소홀히 간과될 수 있는 약한 부분이기 때문에 교단의 의식적이고 섬세한 돌봄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공동체 구성원 고통 공감 중요

온 인류 공동체를 한 혈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보편적 연대성의 관점에서 볼 때도 이미 미자립교회의 아픔은 바로 교단 전체의 고통으로 인식되어야 하지만, 특별히 교회 공동체를 다양한 지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한 몸으로 파악하는 특수한 영적인 연대성의 관점에서 볼 때 미자립교회의 아픔은 곧 교회 공동체 전체의 아픔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이중적 연대성의 지평 안에서 교단 내의 미자립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과 정책들이 교단적인 차원에서 활발하고 책임 있게 논의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미자립교회의 교역자들은 우리와 한 혈통을 나눈 인류가족의 일원이며, 끊을 수 없는 교회의 지체들일 뿐만 아니라 가장 어려운 시절에 우리와 함께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기도하고 우정을 나누던 우리의 소중한 동문(同門)들이다. 우리의 동문들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으로 인식하고 함께 끌어안고 가야 한다. 우리가 이 일을 신실하게 수행할 때, 교단 내부적으로는 평신도들에게 형제사랑의 구체적인 모범을 보여 줌으로써 무너진 영적이고 도덕적인 지도력을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이며, 외부적으로는 정통신학을 정통적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교단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일을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일이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 마음과 동류(同流)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일을 성실하게 해낼 때 아마도 하나님은 마음이 흡족하셔서 우리 교단에 다시 한 번 획기적인 부흥의 계기를 마련하여 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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