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개혁교회 역사적 측면에서 본 시편찬송가

'오직 성경' 개혁자에게 하나님 경외하는 최고 노래는 시편
칼빈 "찬미의 제사 원칙 담아" 강조 ... 예배음악 정착 이뤄지길

총회신학부가 주최한 시편찬송가 공청회에서 발표한 서창원 목사의 글을, 총회 차원에서 공론화된 시편찬송가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추려 소개한다. <편집자 주> 

            

   
 
  ▲ '오직 성경'이라는 슬로건 아래 교회를 개혁한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최고의 노래는 시편이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직접 지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케 하며 그의 행하신 일들을 묵상케 하는 하나의 자극제와 같다.  
 

일반적으로 구약시대에서부터 신약의 예수님 당시와 사도들 및 그 이후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예배음악은 설교와 더불어 예배의 중심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제도에 등장하는 웅장한 찬양대의 역할에 대하여 신약성경에서는 이상하게도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천상에서 있는 찬양 외에(계시록)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서로 화답할 것을 언급한 것이 전부이다. 혹자는 그것이 신약교회 예배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하게 언급할 필요가 없어서 그렇다고 추측한다.

 

그렇다면 구약의 찬양대 문제는 당연한 것이 아니어서 특별하게 언급한 것인가? 그것이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라면 신약의 교회 예배 문제를 다루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언급되었어야만 했다. 없다는 것은 그것이 교회에 반드시 있어야 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더구나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라고 한 본문의 문맥을 보면 교회 예배를 언급하면서 한 내용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 속에서 있어야 신앙생활을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삶 속에서 드려져야 할 노래가 그러해야 한다고 한다면 교회 예배음악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였다는 것이 정설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배음악은 특별한 찬양대 중심의 음악이 아닌 온 회중 중심의 음악이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요 찬양하라고 주신 시편찬송가였다고 말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편 자체가 찬양대를 위하여 주신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구속의 은혜를 입은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주님의 은혜를 인한 감사와 경배의 표시로 하나님의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찬양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하고 있는 이유가 그러하듯 말이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비록 역사적으로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산물일지라도 성경에 기초한 교회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성경적 예배음악을 찾아 예배모범을 제시했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개혁교회 예배음악

일반적으로 교회음악이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서 사용되어지는 모든 음악]을 뜻한다. 그러나 개혁교회 예배음악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 간주하는 성경을 근거로 한 교회의 공적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을 말한다. 적어도 이 정의는 예배 요소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배의 요소는 우리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21장 1항의 기록에 보면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꺼이 수납될 방법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제정되었고, 그 자신의 계시하신 뜻에 의해 제한되어서 사람의 상상이나 고안이나 사단의 시사에 따라, 어떤 유형한 표현이나 기타 성경에 규정되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 받지 않게 하셨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배에 있어서 회중이 다 함께 부르는 노래는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가? 예배 자체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경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예배의 모든 요소도 반드시 하나님이 정하신 규정대로 하나님에게 합당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 규정되어 있지 않고 인간의 상상이나 고안에 의하여 사용되는 것들은 철저하게 배격되어야 함을 개혁교회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것이다. 예배에 있어서 찬양을 하는 행위는 아주 독특한 것이다. 이 행위는 성경 읽기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도 구분되는 독특한 행위이다. 특히 일부 지도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가르치고 있는 [곡조 있는 기도]라는 정의는 정확한 것이 아니다. 물론 찬송에는 기도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실지로 시편의 상당수가 하나님과 교통함에 있어서 즐겨 사용되는 기도문구들이다.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에 찬양과 감사의 내용들이 풍요롭게 들어간다. 그러나 노래의 내용과 관련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기도가 예배의 한 요소이듯이 찬양도 예배의 또 다른 요소라는 것이다. 내용에 있어서 기도를 포함하고 있다고 해서 찬송을 곡조 있는 기도로 단언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찬송으로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자들은 어떻게 가르쳤는가?


종교개혁자들의 시편찬송가

칼빈은 교회 음악 혹은 예배음악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에 대한 그의 철저한 순종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특히 그가 음악에 대한 신학적 관점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지를 가장 중요시하면서 {허영심과 욕심에 차 있는 인간의 음악에 대한 오용의 위험성과 가능성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칼빈의 이 사상은, {그 누구도 하나님께 받은 것 외로는 주님께 합당한 것으로 노래할 수 없다}고 한 성 어거스틴의 주장과 일치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음악은 가볍거나 경박해서는 안 되며 권위와 위엄을 지녀야 하고 온건한 것으로 절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개혁교회 전통에 있어서 예배음악은 반드시 그 내용에 있어서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야 함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인간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놀랍고 기이한 은총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 인간이 부여받은 재질의 우수함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 때문에 초대교회는 시편을 찬양하였으며 중세교회가 사장시킨 시편 찬송을 종교개혁자들은 회중찬송으로 자리 잡게 한 것이다.

[오직 성경]이라는 슬로건 아래 교회를 개혁한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최고의 노래는 시편이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직접 작곡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케 하며 그의 행하신 일들을 묵상케 하는 하나의 자극제와 같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존경하고 영광을 그에게 돌리게 하는 것이다. 칼빈이 직접 제작한 제네바 시편송가 서문에서 칼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성령께서 만드시고 다윗이 노래한 시편 이상으로 좋은 노래나 찬송의 목적에 부합한 노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가 시편을 노래할 때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입에 친히 이 시편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토록 노래하게 하시는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칼빈은 시편을 가리켜 [영혼의 해부학]이라고 하면서 시편을 통해서 성령 하나님은 성도들의 모든 경험들, 슬픔, 두려움, 의심, 소망, 기쁨, 걱정 및 혼동 등을 끄집어내어 치유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시편에 사람이 의식할 수 없는 어떤 감정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마치 우리의 양심을 낱낱이 비추어주는 거울과 같다고 했다. 다른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일군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선언하라고 주신 명령들이지만 시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아뢰는 것으로 주신 것이며, 이 시편은 성도들의 내적 생각들과 감정들을 들춰내며 우리들 각자의 상태를 점검하도록 촉구한다고 했다. 우리에게 결핍되어 있는 연약한 부분들에게 사로잡히거나 수많은 악에 잠식되지 않도록 주의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음악적 역할을 최대한으로 만족 시킬 수 있는 노래는 시편뿐이다. 칼빈이 예배요소로 시편 찬양을 포함시킨 것은 성경에 없는 것을 추가한 것이 아니라 중세교회가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 찾은 성경적 가르침 때문이었다. 칼빈 이후 성경에 신실하기를 원하는 모든 개혁교회들이 시편 찬송을 하나의 중요한 영적 유산으로 간주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코틀랜드 개혁자요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낙스 역시 칼빈과 같은 견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칼빈과 달리 낙스는 종교개혁 초기에 시편찬송을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로는 보지 않았을지라도 시편찬송을 신앙생활에 아주 유용한 힘을 주는 것으로서 성도들, 특히 아이들에게 가르쳐 부르도록 권장하였다.

1556년 낙스가 만든 제네바 예배 모범에 보면 운율적 시편(Metrical Psalms)이 개혁교회 예배에 있어서 회중들이 해야 할 의무조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존 낙스가 아직 살아 있을 때 1564-65년도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공예배 지침서(Book of Common Order)에 들어가 있는 찬송 편에 다윗의 노래인 시편 외에 다른 언급이 전혀 없다. 이것은 공 예배에서 회중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시편찬송을 사용했다는 증거이다. 이것이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17세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21장 5항에서 성경봉독과 말씀강론 및 마음에 감사함으로 부르는 시편가에 대하여 명시함으로써 시편찬송이 장로교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문제는 예배모범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예배당에서 공동으로나 혹 한 가족 끼리나 시와 찬미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모든 신자의 마땅한 본문이니 성경에 합한 말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언사를 사용하라}(4장 1항).

이러한 가르침은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스코틀랜드를 휩쓸면서 일반 찬송가가 공 예배 용 음악으로 채택이 되기까지 예배음악의 유일한 찬송으로 간주되었다. 칼빈이 주장한 것처럼 누구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제외하고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께 찬송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교회들은 그리 많지 않을지라도 장로교 전통은 시편 찬송을 공 예배음악에서 제외시킨 적은 없다.


시편찬송의 유익

칼빈은 시편찬송을 부르는 목적을 세 가지로 언급하였다. 하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둘째는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과 셋째는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기를 기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실지로 칼빈은 찬미의 제사를 올바르게 드리는 올바른 방법에 관해서 정확하게 가르쳐 주는 원칙이 시편에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찬미의 제사를 항상 우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히13:15). 히브리서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속죄제사로 말미암아 신약의 성도들은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음을 논증한다. 그러나 여전히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 있는 제사가 있다면 하나님을 찬미하는 제사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호세아 선지자가 이미 송아지를 잡아 제사하는 대신 우리 입술의 제사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호14:2). 칼빈은 이 사실을 그의 주석에서 {신약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우리의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정직하게 부를 입술이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가 상기시켜 주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찬양을 부르는 일은 더럽혀지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칼빈은 찬미의 제사가 다른 제사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율법 아래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든 외형적인 것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위임을 지적하였다.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이 부분을 강해하면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인하여 복음에 순종하는 삶에는 반드시 감사가 포함되는데 이처럼 순종과 감사를 다 포함하여 찬미의 제사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는 제사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볼 때, 제사는 반드시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집전되어야 할 것이었기 때문에 찬미의 제사 역시 사람들의 고안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노래되어져야 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반드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찬양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임의로 지어내서 하는 것도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보다 이미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인지 계시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에 따라 행해지는 찬양이 주님의 교회에서 불러져야 하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제사는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불로 분향하다가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을 받은 아론의 두 아들들(나답과 아비후의 사건, 레 10:1-3)의 경우처럼 비록 우리들이 주님이 합당치 않게 여기는 것들로 하나님을 찬양해도 당장 징벌하지 않는다고 해서 시편찬송이 없어도 된다고 할 수 없다. 가장 성경적인 찬양은 무엇보다도 말씀에 근거해야 하며, 반드시 개혁주의의 바른 신학과 신앙을 담고 있는 합당한 가사여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으시고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을 이렇게 단언하셨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시편찬송에 대한 신학적 역사적 이해가 충분하지 못할지라도 한국 교회 특히 정통보수 신앙을 강조하고 있는 개혁교회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주신 시편을 노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우리의 신학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우리가 믿고 있는 교리와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까지도 아무런 제재가 없이 허용되어지고 있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맡은 지도자로서 회개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사한 것은 총회 신학부에서 시편찬송가에 대한 공청회를 주관하고 그 필요성을 역설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 것이다. 조국 교회 안에 시편찬송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몇몇 교회들에서 개별적으로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는 시점에서 총회가 이 일에 앞장서 보급한다면 하나님의 진리가 온 성도들의 입술과 가슴에 새겨지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 것이며 동시에 교단의 경제적 수익성 측면도 크게 기여하리라 생각한다. 같은 신학과 신앙을 가진 교단들과 그 외의 성도들이 시편 찬송가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총회적으로 시편찬송가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조국 교회에서도 시편을 예배음악으로 부를 수 있는 영광스러운 날이 속히 오기를 열망하는 주님의 뜻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를 기도한다. 더욱이 우리 교단의 헌법에 실려 있는 예배 모범에서도 주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다루면서 시편을 부르라고 권장하고 있음같이, 시편 찬송가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섬기는 주의 백성들의 손에 쥐어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글=서창원 목사/삼양교회,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강사,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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