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세례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메신저로 이 세상에 왔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치보다 그가 전할 메시지를 드러내는 데 목숨을 걸었다. 그런 요한처럼 나 역시 메신저로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메신저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늘 자문하곤 한다. 메시지 전달보다 나의 욕망만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메시지 전달이 메신저의 숙명이다.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에 우편배달부가 나온다. 편지를 반송하고 싶은 수신자에게 배달부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편지든 배달하는 것이 나의 숙명이야.”

아테네의 한 병사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겼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마라톤 평원을 달렸다. 그 메시지를 전한 후 숨을 거둔 병사를 기억하며 마라톤 경기가 이어지고 있다. 목숨을 건 메신저였다.

메신저의 바른 전달이 메시지를 듣는 이들의 반응과 행동을 만들어낸다. 그것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메시지를 가감 없이 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중요한 포인트! 메시지에 집중하느냐, 메신저에 시선을 빼앗기느냐? 때로는 메신저로 인해 메시지를 놓칠 수도 있다. 따라서 좋은 메신저는 자신을 부각하지 않아야 한다. 옷이나 외모에 시선을 빼앗기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메신저의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가 메시지를 전달받는 이들의 시선을 강탈할 수도 있다. 메시지는 온데간데없고 메신저만 남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가 감사한 것은 난 아무리 애써도, 크지 않은 키를 비롯한 외모가 내 설교를 듣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청중은 메시지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웃곤 한다. 물론 내 아내는 ‘나’라는 사람에게 꽂혔지만. 주님께서 날 감추시고 그분의 의도만 전하도록 나를 사용하시는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2000년 전, 가장 강력한 메신저였던 바울 사도 역시 그 외모가 주님의 메시지를 드러내기에 적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메신저의 삶이 믿을 만 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메시지를 전하든지 영향력은 감소될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메신저 자체가 메시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메시지를 전달받는 이들이 메시지보다 메신저를 더 좋아한다면 실패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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