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사람마다 소화능력이 다르다. 누군가는 돌도 씹어 먹을 정도라고 하지 않는가. 문제가 있는 음식을 먹고도 탈 없이 소화해낸다. 그러나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음식도 소화를 못하고 체하고 탈이 나는 사람도 있다. 기분에 따라 속이 쓰리기도 하고 누구와 먹었느냐에 따라 체하기도 한다. 소화능력의 차이다.

목회자로 사는 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 왔고 또 만나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목회자의 운명이다. 그 많은 사람들은 그 수만큼 스타일이 다양하고 또 각각의 독특함을 가진다.

그런 모든 사람을 소화해 내고, 또 내 속을 뒤집는 사람도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 목회자의 능력, 아니 기능이 아닐까. 즉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소화능력이 뛰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뜨겁든 차든, 딱딱하든 부드럽든, 짜든 맵든 싱겁든 모든 음식을 소화하는 것은 소화능력이다. 그것처럼 어떤 사람이든 소화해내야 하는 사람이 목회자다.

그러니 소화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곧 목회자인 나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28년을 한 교회에서 섬겼다. 그 기간 중에 내가 소화 못한 사람들이 여럿, 아니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다른 교회로 옮겨간 이들이 확실하게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그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나를 소화 못해 떠나기도 했겠지만 돌아보니 그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그들이야 소화 안 되면 떠나도 되겠지만 난 누구든 소화해야 할 책임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래서 성격 좋아 보이는 주변의 목회자들, 누구에게든 웃고 화 내지 않고 부드러운 그런 분을 만나면 참 부럽다.

주님도 누구든 소화했을 것 같다. 여러 타입의 모든 사람들을 품으셨을 것이다. 독하게 괴롭히는 자들도 잘 받아주셨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요즘 소화 못해 내 입에서 뱉어버린 사람들이 다시 떠오른다. 그냥 미안하다. 그들이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은 점점 옅어지고 이제는 미안한 마음이 크다. 음식은 뭘 먹어도 소화 잘해내는 나지만, 사람은 너무 가리는 편인 듯하다. 그래서 소화불량일 때가 있었으니 말이다.

누구라도 소화 못한 내 책임이 크다. 주님께서도 그것을 안타까워하실 것 같아 얼굴 들기 힘들다. 소화능력을 키워야겠다. 아니면 소화제라도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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