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목사의 섬마을 순례]

하조도는 목포에서 100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진도군 조도군도의 중심에 위치한 섬이다. 면적 10.55㎢에 해안선 길이는 38km이며, 해발 234m의 돈대산이 정상을 차지한다. 2021년 기준으로 660가구에 1100명의 인구가 거주 중이다. 조도군도는 유인도 35개, 무인도 119개 등 총 154개 섬들로 구성된, 넓은 행정구역을 보유하고 있다.

200여 년 전인 1816년, 영국 함대가 청나라 위해를 거쳐 조도 일대 해역에 들른 적이 있다. 함대 중 리라호의 선장이었던 바실 홀은 <한국 서해안과 유구도 탐색 항해 전말서>라는 보고서에서 진도와 조도를 언급하였다. 그는 상조도의 도리산 전망대에 올라 크고 작은 섬들이 새처럼 곳곳에 앉아 있는 풍경을 보면서 ‘진도 조도해역이 동양에서 항구 건설에 가장 좋은 후보지’라고 기록하였다.

바실 홀이 남긴 보고서들을 통해 조도는 국제사회에 일찍부터 알려졌으며, 특히 하조도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영국에서 더 유명한 섬이 되었다. 그로부터 70년 뒤인 1885년에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후, 진도를 자신들에게 빌려달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약 조선 정부가 이 협상에 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진도는 어쩌면 지금의 홍콩이나 마카오처럼 서양문물이 넘쳐나고, 영어가 공용어가 된 특구로 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도 해역에는 오래전부터 ‘고기 반, 물 반’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어족자원이 풍부했다. 당연히 섬에는 어선도, 뱃사람들도 많았다. 조도 면사무소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박종수씨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 후 조도에는 닻배 32척, 투망 51척, 중형어선 10척 등 모두 100여 척의 배가 있었다고 한다.

조도가 풍어로 인해 호황을 누리며 인산인해를 이루던 시절, 전국 항·포구 어디에서나 “조도 갈 이! 조도 갈 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조도에 갈 인력은 내 배를 같이 타고 가자”라는 뜻으로 쓰인 ‘조도갈이’는 지금도 목포 해남 신안 완도 일대에서 조도 사람들을 일컫는 별명처럼 사용된다. 특히 조도 사람들은 어로기술이 뛰어나 전국 어디서든 숙련된 기능인으로 인정받았다. 웬만한 포구에는 조도 사람들이 꼭 있기 마련이었고, 대부분 전문가 대접을 받았다. 지금은 어로장비의 진화, 원양어업의 발달로 예전과 같은 ‘조도갈이’의 명성을 누리지 못하지만, 역사 속에서 두고두고 그 이름이 존재할 것이다.

하조도 등대가 세워진 구릉에서는 멀리 서해 인천에서부터 남해 끝 부산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을 연결하는 ‘장죽수도(長竹水道)’를 관찰할 수 있다. 등대 앞에서 내려다보는 장죽수도는 요동치며 세차게 흘러가는 물살의 기세가 대단하다. 조류의 흐름이 어찌나 빠른지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과 호형호제할 정도이다. 울돌목이 좁고 소용돌이치며 도는 거센 물살이라면, 하조도 등대 앞바다는 폭이 18km에 이르는 넓고 거대한 물살이다. 한반도의 서해와 남해로 흐르는 물살이 서로 방향을 바꿔가며 힘차게 흐르는 것이다.

등대 옆 해안절벽에는 파도와 바람에 깎인 바위가 갖가지 형상으로 빚어진 만물상을 구경할 수 있다. 돈대봉 정상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들꽃군락지도, 넓은 바다 위에 펼쳐진 다도해의 모습도 온통 절경이다. 상조도와 이어지는 조도대교 끝자락인 ‘나루꾸지’에서는 공원화 작업이 진행 중이다.

하조도에는 3개의 교회가 있는데, 1973년도에 개척된 조도중앙교회가 섬 전체의 중심 교회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섬 인구가 많을 때는 장년 130명, 주일학교 학생들이 60명 정도로 교세가 부흥했던 시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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