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목사의 섬마을 순례]

동거차도는 면적이 2.23㎢이고, 해안선 길이는 12km, 인구는 64가구 130명(2020년 기준)이 거주하는 섬이다. 생활권인 목포에서는 68km나 떨어져 있다. 목포에서 오전 8시 반에 출발하는 여객선 신해6호를 타면 무려 7시간이나 걸려 종착지 바로 직전, 32번째로 들르는 섬인 동거차도에 도착하게 된다.

백제시대에 제주도까지 왕래하기 위해서는 꼭 이 섬을 경유해야 한다고 해서, ‘거차도(巨次島)’라는 명칭이 붙었다. 9세기에 일본인 엔닌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사흘간 거차도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엔닌이 남긴 일기에서는 이 섬을 ‘구초도(丘草島)’라 표기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거추리도(巨趨里島)’로 명기되어 있다.

동거차도의 선착장은 섬 깊숙한 만 안쪽에 형성되어, 천혜의 피항지로 손색이 없다. 선착장 오른쪽에 방파제가 있는데, 이 방파제가 해안도로와 연결된다. 섬은 동쪽마을인 동륙리와 서쪽마을인 동막리로 나누어지는데, 몇 해 전 두 마을 사이 포장도로가 생겨 마을 간 왕래가 편리해졌다. 두 마을 중 규모가 큰 동륙리에는 보건진료소와 초등학교 분교 등이 세워졌고, 동막마을은 U자 형태의 해안을 지니고 있다.

바위로 형성된 동거차도는 빗물이 땅으로 스며들지 않고 바다로 흘러가, 고질적인 물 문제에 시달린다. 그래서 대형 저수지와 정수장 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식수는 이틀에 한 번씩 배급한다. 생활용수는 빗물을 받아 사용하는데, 이를 위해 마을마다 대형 물탱크를 구비해두었다.

동거차도는 서거차도 상하죽도와 함께 거차군도를 이룬다. 주변 어장이 좋아 1937년에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어획고를 올렸으며, 이곳에서 파시가 서기도 했다 한다. 지금도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어업을 통해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주민들 대부분은 주낙질과 돌미역, 톳 채취를 생업으로 삼고 있다. ‘갱변’에서 해마다 해조류를 공동으로 채취하고 건조하여, 그 수익을 공동분배하는 마을 공동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근해에서는 갈치·멸치·고등어·도미·방어·붕장어·전어 등이 잡히는데, 뭐니 뭐니 해도 동거차도의 특산물은 멸치이다. 즉석에서 가공하여 햇볕에 말린 동거차도 은멸치는 품질이 빼어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멸치사업이 한동안 어려움에 처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섬 가까운 해역에서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벌어지며,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엄청난 양의 기름이 유출된 후유증을 오랜 기간 겪은 것이다.

특히 세월호에 실려 있던 벙커C유와 경유 등이 방출되면서 동거차도의 갯바위와 839㏊의 양식장이 오염되는 바람에 큰 피해를 당했다. 게다가 함께 거차군도를 이루는 무인 섬인 병풍도와 북섬 등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구경하기 위해 찾아오던 관광객들과 낚시꾼들의 발길까지 끊어지며 이곳 주민들은 맘고생을 더했다.

동거차도의 동남쪽 끝에는 ‘진도 동거차도 구상 페페라이트(silicic globular peperite)’라는 암석이 있다. 최근 천연기념물 제505호로 지정된 이곳을 배에서 바라보면 마치 성곽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고, 동굴처럼 보이는 곳도 있다. 축소된 고대도시의 폐허처럼 보이기도 한다. 퇴적작용과 화성활동(특히 마그마의 관입이나 용암의 유출)이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에 이런 특이한 지형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동거차도교회는 1983년에 설립되었다. 3대째로 부임한 목사님이 1994년부터 지금까지 장기 목회를 하는 중이다. 사모님은 마을 이장을 맡아 일하며 지역복음화에 애를 많이 쓰고 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