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목사의 섬마을 순례]

대모도(大茅島)는 완도에서 직선거리로 9.75km에 위치한 면적 5.83㎢의 섬이다. 청산도에서 서쪽 방면으로 보이는 섬인데, 마을의 돌담이나 형형색색의 양철지붕 모습이 청산도와 그대로 닮았다. 향토색 짙은 옛 고향의 느낌을 준다.

주민이 거주하는 마을은 모두 2곳이다. 서편마을을 모서리, 동편마을을 모동리라고 부른다. 같은 섬에 있지만 두 마을의 생활양상은 완전히 다르다.

소안도를 지척에 둔 모서리는 인구도 많지만, 포구가 제법 크다. 특히 바다의 깊이와 조류 등이 적당하다는 점 등 김 미역 다시마 등의 양식에 양호한 조건들을 지녀, 주민들에게 주 소득원이 되어주고 있다. 모서리의 김양식은 완도군 전체에서도 가장 활발한 것으로 명성이 나있다.

모동리는 모서리에 비해 규모가 작은 동네임에도 이곳에 면사무소 출장소를 비롯한 여러 공공기관들이 세워져있다. 1960년대 부인회가 중심이 되어 마을재건운동을 시작했는데, 매끼니 보리쌀 한 숟갈씩 저축한 자금으로 마을 발전을 위한 여러 사업들을 펼쳐나갔다. 1971년 면 출장소를 세울 때도 부인회에서 당시로서는 꽤 큰돈인 27만5000원을 선뜻 내놓아, 출장소도 마을에 유치되고 건물 신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대모도는 바로 옆 소안도와 함께 항일운동이 활발했던 섬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에 대모도에는 마을의 개량서당 지원과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모도청년회’가 조직되었다. 1920년 초부터 천병섭 장석칠 정두실 최찬규 서재만 등 배달청년회 소속 14명은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돌입하여, 각 마을을 다니면서 주민들에게 항일무력시위를 권유했다.

1925년 1월 월례회의에서는 일본인은 물론 친일세력과 단절할 것을 결의하였고, 4월 회의에서는 일본인들을 응징하고 경찰서 등 관공서를 파괴할 것을 다짐하였다. 하지만 그 뒤 청년회의 비밀활동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회원들이 곤욕을 치렀다.

천홍태 애국지사는 1926년 10월 4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1927년 6월 18일 옥중 순국하였다. 1993년에 와서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 같은 독립유공자를 무려 여섯 명이나 배출했으니, 대모도는 대단한 섬임에 틀림없다.

모서리 선착장 앞에는 마을회관과 정자가 세워져있고, 그 뒤로 약간 높은 둔덕이 있다. 그곳에 올라가면 두 개의 조형물이 나타난다. 하나는 모도항일운동기념비이고, 다른 하나는 북을 표현한 상징물이다. ‘독립의 혼이 북소리를 통해 남해 바다를 흔들어 울려 퍼지리라’는 기원이 담겨있다.

대모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1977년의 일이다. 당시 모서리 주민들 중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있어서 마을회의를 통해 교회 설립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는데, 별다른 반대가 없었다고 한다. 여러 공공기관들이 모동리에 들어서자, 교회만이라도 자신들의 마을에 유치하고 싶었던 모서리 사람들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처음에는 마을회관을 예배처소로 사용했던 모도교회는 교인들이 점점 늘어, 설립 4년 차에는 60명까지 늘어났다. 교회당을 언덕 위 당집 터에 신축해 옮겨갔다가, 지금은 다시 마을 안으로 들어와 있다. 이 과정에서 무속신앙과 부딪치는 소동도 겪었는데, 당시 마을 이장에 나선 인물의 공약 중 하나가 ‘교회의 이전’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금도 모도교회는 아담한 교회당에서 예배하며, 주민들의 영혼 구원과 마을 발전에 이바지하는 중이다. 이 같은 사연들을 알고 대모도를 돌아보면 훨씬 풍성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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