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목사의 섬마을 순례]

대두라도는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에 딸린 섬으로 면적은 1.01㎢, 해안선 길이는 7.6㎞, 인구는 29가구 64명이다. 섬 모양이 콩 같이 생겨 한자식 이름으로 ‘대두(大豆)라도’라고 한다. 1590년경 장씨가 처음 입도했다는 설과, 1659년 돌산의 나주 임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는 설이 각각 전해진다.

2015년 12월 22일 화태대교 개통으로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섬은 당연히 화태도이고, 그 다음이 대두라도와 월호도와 나발도이다. 이 다리가 놓이면서 네 개의 섬 주민들의 여수 나들이가 훨씬 쉬워졌기 때문이다. 특히 대두라도와 화태도 월전마을 사이는 워낙 가깝고 여러 개의 섬들이 둘러싼 지형으로 항상 파도가 잔잔하여, 편리하게 배를 타고 건너다닐 수 있다.

여객선이 닿는 대두라도 선착장에서 왼편으로 가면 학교가 나오고, 길을 따라 안으로 더 들어가면 나타나는 동네가 대두마을이다. 마을 뒤쪽에 높지 않은 산이 완만하게 내리뻗은 형세이며, 바닷가를 따라 마을이 형성돼 있다. 바닷가에는 타원형의 포구가 있고, 부속시설인 물양장과 선양장이 제법 넓다.

포구 오른쪽 바닷가에는 커다란 가두리양식장이 있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가둬 기르는 것을 ‘가두리’라고 한다. 작은 치어를 사서 가두리에 넣어 놓고 3년을 키워야 판매할 정도 크기로 자란다. 길게 이어진 해안가, 포구에는 건물들이 제법 있는데 살림집은 아니다. 이 건물들은 대부분 창고이자 공장이다. 가두리 양식장에서 나오는 고기들을 가공하는 장소인 것이다.

봉통마을 바닷가에는 세 집이 멸치잡이를 한다. 바다에 설치해 놓은 낭장망에 멸치가 들면 배를타고 나가서 멸치를 잡아온다. 그 멸치들을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가마솥 곁으로 운반한 후에는 삶고, 말리고, 거두어서 선별하고 다시 부대에 담아서 배에 싣고 여수로 나간다.

대두라도 주민 중 김재연(53) 서순례(46)씨 부부는 슬하의 7남매는 물론이고, 세상을 먼저 떠난 동생을 대신해 두 조카까지 대신 키우면서 우편배달 일을 한다. “5년 정도 가두리 양식을 하다가 태풍 때문에 큰 손해를 보고, 아직도 회복하지 못한 채 빚만 있지요. 작년에 작은 딸이 대학에 합격했는데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해 걱정입니다”라고 말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수많은 자녀들을 모두 돌보고 교육시킨다는 것은 부부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많은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이웃집과 경로당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열심히 돌봐주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봉통마을 14가구 30여명의 주민들이 모두 나서서 아이들이 두라분교에 입학할 때까지 부모 역할을 대신 해주었다. ‘한 아이를 제대로 키우려면 온 동네가 나서야 한다’는 아프리카 속담은 이런 경우에 딱 맞아 떨어진다.

대두라도의 두 교회는 역사가 깊고 모범적인 모습으로 성장했다. 산꼭대기에 있는 두라교회는 1938년에, 아래 마을에 있는 대두교회는 1982년에 각각 설립되었다. 대두마을에는 대리석으로 세워진 하얀 건물이 하나 있는데, 대두라도 전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이 건물이 바로 대두교회 예배당이다.

대두마을은 가두리 양식을 하는 주민들이 많아 부자마을로 불린다. 올해로 21년째 대두마을에서 장기목회를 하는 이홍식 목사는 섬 교회인데도 장로 4명, 성도 50명, 1년 예산은 1억5000만~2억으로 상당한 교세를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최근에는 예배당 리모델링이 한창이다.

대두교회는 해외선교도 열심히 한다. 태국 라오스 남아공 스리랑카 캄보디아 등지에 단독으로 교회들을 세웠고, 성도들이 직접 선교 현지까지 찾아가 방문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열심히 섬기며, 섬복음화 및 세계복음화에 앞장서는 낙도교회들을 돌아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해지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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