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목사의 섬마을 순례]

거문도는 서로 다리로 연도된 동도, 서도와 함께 3개 섬으로 구성되었다.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편리하게 이 다리를 이용한다. 세 섬 중에서 배가 닿는 가장 작은 섬이 거문도이다. 여수에서 남으로 114.7㎞, 고흥 녹동 항에서 58㎞, 제주에서 110㎞ 떨어져 있다.

거문도는 하늘이 도와야 갈 수 있는 섬으로 알려져 있다. 맑은 날이라도 바람이 제법 심하면 뱃길도 위태롭다. 그러나 깃을 세운 파도도 내항에만 들어서면 숨을 죽인다. 동도와 서도 두 개의 섬이 거센 파도를 막아 주니 내해는 호수같이 잔잔하다. 그 옛날 러시아, 영국, 미국, 일본 등이 탐낼 만한 천혜의 항구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일본 양식의 주택이 많이 남아 있다.

조선말에는 왕조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여, 영국 해군이 200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던 거문도를 1885년부터 1887년까지 2년간 무단 점거하기도 했다. 영국 깃발을 꽂아 놓고 해밀턴항구라는 이름까지 붙였던 이 사건을 일명 ‘거문도사건’이라 부른다. 해밀턴이라는 명칭은 당시 영국 해군성 차관의 실명을 딴 것이다. 군함 6척과 수송선 2척을 앞세운 영국해군은 거문도를 점령한 뒤, 군사기지와 항구를 만들었다. 그 당시 이곳에서 사망한 영국군들의 묘지도 섬에 남아 있다. 원래는 9기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3기만 있다.

한때 거문도에 머물던 군함의 숫자는 10척까지 증가했다. 그러나 섬을 차지할 명분이 없던 영국군은 23개월 만에 철수했다. 그 무렵 영국 군인을 상대로 장사해 한몫 잡으려던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왔다가, 비어버린 거문도에 자리잡았다. 그들은 바다를 매립해 술집과 유곽을 짓고 길을 냈다. 해방 직전인 1943년 거문도에 거주하는 일본인 인구는 87호 355명에 이르렀다. 지리적으로도 거문도는 일본이 부산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어, 일본 어부들이 하룻밤 물길로 거문도까지 와서 조업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서도 동남쪽 끄트머리 수월산(196m)에 위치한 ‘거문도등대’는 40km 거리까지 불빛이 나가는 동양 최대 규모의 등대이다. 거문도등대가 세워진 것은 1905년이다. 이 섬이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2006년에 신축한 등탑으로 인해 예전의 등대는 해양유물로 보존되고 있다. 2006년 8월 1일 불을 밝힌 새 등대는 높이가 34m로 구 등대(6.4m)보다 훨씬 높다. 해면으로부터 따지자면 약 100m 높이다. 154개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 등대 전망대에 서면 거문도와 삼부도, 그리고 수평선 위의 백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백도(白島)는 필자의 생각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다. 거문도에서 동쪽으로 28㎞쯤 떨어진 백도는 망망한 바다 위에 점점이 뿌려진 39개의 크고 작은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무인군도이다. 자연환경과 생태계 보존을 위해 국가 지정 문화재 명승 제7호로 지정돼, 원시적인 자연미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백도 안에는 동백나무, 후박나무, 눈 향나무, 석곡, 소엽풍란, 원추리 등 353종의 아열대 식물과 천연기념물 제215호인 흑비둘기를 비롯해 가마우지, 휘파람새, 팔색조 등 뭍에서는 보기 힘든 30여 종의 조류와 희귀동물도 서식하고 있다.

‘남해의 해금강’으로 불리는 백도에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웅장하게 솟은 바위벽은 세로로 골골이 파여 있어 오묘한 모습을 보여준다. 각시바위, 서방바위, 병풍바위, 곰바위 등 바위섬들마다 천태만상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거문도교회는 6·25전쟁 중이던 1951년 부산북성교회 이광옥 집사에 의해 설립됐다. 제주도로 피난 중에 풍랑을 만났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거문도에 정착하며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전남은 타 지역에 비해 섬 복음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거문도교회도 오랜 세월 부흥과 발전을 거듭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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