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목사의 섬마을 순례]

한산도는 한산면의 주도이자 한려해상공원의 출발점이다. 인구는 17개 마을 615가구 1079명이다. 특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왜군 함대를 궤멸시켜, 한산대첩을 이끈 역사적인 장소다. 이순신 장군 휘하의 삼도수군통제영이 자리했던 곳이기도 하다.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한산대첩은 우리 수군이 영세한 전력을 가지고도 학익진과 거북선의 위력을 바탕으로 일본 수군에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당시 해전에서 왜군의 주력을 궤멸한 아군은 남해의 제해권을 다시 장악할 수 있었다.

지금도 섬 곳곳에는 한산대첩에서 비롯된 지명들이 남아 있다. 추봉교 입구에 있는 마을 이름은 한산도의 중심지 ‘진두’(津頭 혹은 陳頭)마을이다. 진두는 예로부터 추봉도, 용호도, 죽도를 잇는 큰 나루터였던 ‘나리선 머리’의 한자 지명으로 생각된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 수군이 진을 치고 초소를 두어 통제영과의 연락보급과 해상경비 임무를 수행하던 곳(陣頭)이며, 또한 예부터 한산도와 추봉도 사이의 좁은 해협을 연결하는 나루터(津頭)의 구실을 해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진두광장에서는 해마다 겨울철에 한산도, 용호도, 추봉도, 비진도 등의 섬에서 갯바람을 맞으며 탐스럽게 자란 시금치(일명 갯바람 초)를 한산농협에서 사들이는 경매가 열린다. 또한 진두는 망산 등산로가 시작된 역할을 한다.

통영 시민과 한산도 주민들이 즐겨 찾는 ‘망산’이라는 지명은 임진왜란 당시 우리 병사들이 이곳에 올라 망을 보며 일본군의 동태를 살폈던 데서 유래한다. 망산 산행코스는 3구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구간(제승당-망산 정상-진두마을까지 5.9km)은 2시간 10분, 제2구간(제승당-망산 정상-야소마을까지 3.9km)은 1시간 40분, 제3구간(제승당-망산-장작지 뒷산-띠밭 등-장작지마을까지 7.0km)은 3시간이 각각 소요된다.

다음으로 소개할 ‘하포(荷浦)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보급창을 두고 각 진영에 보급할 군수물자를 관리했던 곳이다. 우리 수군의 병참 지원을 위해 군수물자를 싣고 들어온 배들과, 각 진영에 보급할 물자를 실어 나르는 배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일했다 하여 ‘멜개’라고도 일컬었다.

그리고 ‘못개’는 하포(멜개)마을을 중심으로 남북에 솟아 있는 두 산을 잇는 잘록한 목 너머에 위치해 있다. 당시 이곳에는 수군을 위해 넓고 큰 연못 여러 개를 만들어 놓고, 군사용 식수 및 생활용수를 저장했다.

‘문어포(問語浦)’의 유래도 재미있다. 한산해전에서 패한 왜적들이 빨래하던 아낙에게 도망칠 길을 물었다는 이야기가 배경이 된다. 왜적들이 ‘이리로 가면 넓은 바다로 빠져나갈 수 있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거짓 대답을 했다고 해서 ‘문어포’(問語浦)라는 이름이 붙어졌다 한다.

그 말에 속은 왜적들은 한산만 제승당으로 몰려들었다가 길이 막혀 오도가도 하지 못하는 중에, 뒤를 쫓아온 아군과 앞서 상륙한 육전대에게 모조리 도륙당하고 말았다. 일설에는 이곳에는 문어가 많이 잡혀 ‘문어의 항구’라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졌다고도 한다.

사적 113호 한산도 이충무공유적지 제승당(制勝堂)은 107대 통제사 조경이 세운 건물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해군작전사령관실 같은 곳이다. ‘승리를 만든다’라는 뜻을 가졌다. ‘한산문’이라고 쓴 액자의 글씨는 충무공의 친필이라고 한다. 제승당 왼쪽의 문을 지나가면 한산정(閑山亭)으로 향한다. 충무공은 이곳에서 직접 부하 무사들과 함께 활쏘기를 연마했다.

한산도에는 모두 여섯 교회가 세워졌다. 면소재지에 한산도교회가 있고, 역사가 깊은 두억교회도 있지만 섬 복음화는 더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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