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목사(여수노회·목포과학대 섬해양선임연구원)

용초도는 면적 4.9㎢, 해안선 길이 8㎞의 섬이며, 최고봉은 수동산(174m)이다. 용의 머리를 닮은 바위가 있고, 나무보다 풀이 많아 ‘용초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용초마을과 호두마을 등 두 마을에 141가구, 264명의 주민이 산다.

용초마을에는 6·25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1952년 5월부터 1954년 말까지 약 3년 동안, 미군과 국군 1개 대대가 용초마을에 주둔하며 2000여 명의 북한 포로들을 관리했다. 포로수용소하면 대부분 거제도만 알고 있는데 한산면 용초도, 추봉도의 추원과 예곡마을에도 수용소가 설치된 바 있다.

1952년 5월, 보리농사를 하고 있던 용초도 주민들의 눈앞에 갑자기 미군과 국군들이 들이닥쳤다. 당시 용초도에는 100여 채 가옥에 7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강제철거령에 따라 하루아침에 전답과 가옥 등 생활터전을 모조리 빼앗기고 주변 한산도 비진도 죽도 등으로 강제로 이주해야 했다.

주민들이 떠난 용초도의 논밭은 군인들이 불도저로 깔아뭉개고, 가옥들도 불살랐다. 그 자리에 길을 만들고 시멘트로 거대한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급조된 포로수용소는 용초도 큰몰(큰 마을)과 제싯골(작은마을), 재너머에 있는 논골에까지 철조망이 만들어질 정도로 큰 규모였다. 제싯골 왼쪽 언덕에는 수용소 소장을 비롯한 장교들의 숙소, 무기와 군사장비 같은 시설물을 관리하는 건물 등이 있었다.

많은 숫자의 포로들을 관리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막사마다 자치대를 만들어 관리했지만, 통제하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원래 거제도에 모여 있던 공산군 포로들은 처우를 개선하라며 협상을 벌이던 중, 당시 포로수용소장인 도트 준장을 납치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악질포로들을 분리하여 용초도와 추봉도로 옮겨가는 바람에, 이 두 섬에 사는 주민들은 제대로 된 보상도 없이 쫓겨나가 3년 동안 고생을 한 것이다. 용초도와 추봉도에 수용된 포로들은 성격이 매우 거칠어, 거의 매일 데모를 하는 바람에 최루탄을 쏘아 진압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휴전협정까지 체결됐지만 용초도 사람들은 곧바로 마을로 돌아올 수 없었다. 휴전 후 포로 교환이 이루어진 다음, 이번에는 이북 포로수용소에서 송환된 국군포로들이 용초도에 수용되어 혹독한 사상 검증을 받았던 것이다. 이들의 수용 기간까지 지나고 나서야 주민들이 섬에 들어올 수 있었다.

돌아온 주민들을 맞이한 것은 포로수용소 건물, 그리고 폐허가 된 자신들의 집과 전답이었다. 용초도 사람들은 괭이와 삽과 호미를 들고 집을 짓고, 땅을 파서 논밭을 다시 일구었다. 6·25한국전쟁은 용초도에 혹독한 상처를 남겨주었다. 지금도 용초마을 산중턱 곳곳에는 영창, 급수시설, 막사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그 시절의 아픈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돼, 이번에는 커다란 자연 재해가 찾아왔다. 1959년 9월 추석에 불어 닥친 태풍 사라로 인해 범람한 바닷물이 마을을 덮치는 바람에 주민 13명이 숨지고, 60여 채의 가옥과 23척의 배가 부서졌다. 이 때문에 마을의 호안축조공사가 2년 동안 계속되는 등 복구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2003년 태풍 매미 때도 용초도 주민들은 또 한 차례 큰 피해를 당했다. 당시 초등학교 분교가 거대한 파도에 휩쓸릴 정도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용초도는 2개의 교회가 있다. 용초마을 용초교회는 1954년, 호두마을의 호두교회는 1958년에 각각 설립됐다. 호두교회 설립에는 당시 초등학교 교장이던 배은직 선생의 수고가 있었다. 1960년대에 잠시 교회 문을 닫았다가, 1970년 현재의 예배당을 건축하며 역사를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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