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목사의 섬마을 순례]

통영항에서 남쪽 18km 지점에 있는 연대도에는 2015년 기준 44가구 73명이 살아간다. ‘연대도(烟臺島)’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왜적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섬 정상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봉화를 올린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섬의 경사가 급하고, 남쪽 해안으로는 높이 10m가량의 해식애가 발달했다. 평지가 있는 북서 해안 쪽에 연대마을이 들어서 있다. 바다 쪽에서 바라보면 낮은 구릉지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해안도로인 ‘연대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다보면 마을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나타난다. 골목길로 들어서자 특이한 문패들이 시선을 끈다.

예를 들어 ‘마늘농사를 많이 지으면서 부지런하고 착한 할머니가 산다는 박말수 할머니댁’ ‘노총각 어부가 혼자 사는 집’ ‘연대도에서 가장 똑똑한 천성금 할머니 댁’ ‘꽃이 있는 풍경 어정자 할머니 댁’ ‘팽나무가 오래된 집’ ‘윷놀이 최고 고수의 집’ 같은 식이다. 집집마다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있고, 문패만 보아도 누가 그 집에 살고 있을지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한 때 약 60호 120명에 이르던 주민 중 어촌계원 40명 정도가 배를 가지고 바다에 나가서 일했다고 한다. 연대도의 어업은 외줄낚시가 주종을 이룬다. ‘채낚기’라고도 부르는데 20여 척의 배들이 계절에 따라 볼락이며 도미, 삼치, 농어 등을 잡는다.

예전만은 못하지만 지금도 연대도 바다에는 전복, 소라, 고동, 해삼, 미역, 돌김 등 갖가지 해산물이 풍부하다. 이를 채취하기 위해 해마다 30명 정도의 제주도 해녀들이 물질을 하러 섬에 들어왔다. 그 시절에는 섬에 돈이 많아서 ‘돈섬’이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이후 오염과 남획으로 해산물 수입이 줄어들었다.

지금은 가두리 양식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연대도에는 1970년대 처음으로 양식업이 도입되었다. 처음에는 홍합과 굴, 미역 양식 등 아주 초보적인 것들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우럭 광어 참돔 등의 주력 생산품종이다.

일제강점기 때 사라라는 이름의 일본인이 연대도를 찾아왔다. 마음씨가 곱고 순한 연대도 사람들과 사라는 뜻이 잘 맞았던 것 같다. 그는 일본의 어업 기술인 정치망을 도입해 조업을 했다. 이를 계기로 연대도 사람들이 일본을 오가는 교류가 활발해졌다. 주민들 중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머구리(잠수) 배를 타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부산에서 여객선을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까지 가서 일주일씩 머물며 굴을 까는 품팔이도 했다. 일본에서 머구리배 기술을 배워온 주민들이 들여온 배가 자그마치 20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육지와의 접근성이 뛰어난 연대도에는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다. 특히 2015년 1월에는 이웃 섬 만지도와 연결한 출렁다리가 개통되었는데,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찾아와 출렁다리를 건너며 낚시도 하고 휴식을 취하는 풍경을 종종 볼 수 있다.

연대도 마을 한가운데에는 비석이 두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패지해면(賜牌地解免)’ 기념비이다. 사패지란 ‘임금이 내려주는 논밭’이라는 뜻이다.

충렬사(사적 제236호)는 충무공 이순신의 업적을 기념하고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데, 숙종21년(1695년) 당시 제71대 통제사 김중기가 연대도를 사패지로 받아 섬에서 생산된 곡식을 충무공의 제사에 바치기 시작했다. 자연히 연대도 주민들은 소작농 신세가 되었다. 1989년이 되어서야 연대도 토지들이 주민들 소유로 돌아왔다. 바로 이를 기념하며 비석이 세워진 것이다.

연대도를 비롯한 통영 일대 섬 대부분에는 당산제 등 무속신앙 문화가 강하다. 교회들은 이에 맞서 힘겨운 영적 싸움을 벌인다. 연대도산성교회는 부산산성교회 지원으로 1988년 설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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