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일제가 그 악행을 더해가며 패망으로 향하던 1940년대에 우리 조선 사람들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강제 개명하도록 했다. 소위 ‘창씨개명’이다. 1930년대 말의 신사참배 강요에 이어지는 민족정신 말살 정책이었다. 일제는 이것을 황국신민서사 암송, 그리고 지원병제도 등과 병행했다. 조선어를 사용하지 못하게도 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조선총독부가 창씨개명을 시행한 1940년 2월부터 3개월 동안 이것을 따른 조선인은 7.6%에 불과했다. 그러자 총독부는 춘원 이광수 같은 유명인을 이용하며 창씨개명을 독려했다. 또 권력기구를 동원하는 등 강제력으로 그 해 8월까지 창씨개명 비율을 79.3%까지 끌어올렸다. 개명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각급 학교의 입학을 가로 막았다. 그리고 공사를 가리지 않고 채용에 불이익을 주었다. 급기야 끝까지 거부하는 조선인을 우선적인 노무징용 대상자로 지명하기도 했다.

이렇게 창씨개명은 일제의 의도대로 진행됐다. 3·1운동 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방향을 튼 일제는 몇몇 민족 지도자까지 친일행각에 끌어들여 민족정신을 굴복시키려 한 것이다. 그래도 창씨개명을 거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그 부당함을 지적하다가 구속되는 인사들이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었다. 이런 일제가 진주만 폭격으로 미국을 전쟁에 불러 들였고, 결국 미국의 원폭투하로 태평양 전쟁 종결과 함께 우리의 굴욕적 역사도 끝을 맺게 되었다.

8·15 광복절을 맞으면서 새삼 아픈 역사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할 역사 앞에서 나를 돌아본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나는, 이 세상 누군가가 요구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세상처럼 되어 가는 것은 아닌 지. 아무도 이름을 바꾸도록 강제하지 않지만, 삶은 어느새 세상을 닮아 버리고, 의식과 가치관은 세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은 아닌 지.

친일파를 비난하지만 세상에 휩쓸려 가버리는 나 자신은 이런저런 명분으로 합리화한다. 난 내 이름을 지키는 지, 그리고 목사라는 직함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삶을 지켜내는 지. 얄팍한 이익과 욕심 앞에 이름도 삶도 넘겨버린 것은 아닌 지 싶다. 어쩌면 그렇게 팔고도 잃은 줄도 모르고 사는 것 같아 많이 아픈 광복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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