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목사의 섬마을 순례]

한려수도의 끝자락에 있는 욕지도는 면적이 14.5㎢, 해안선의 길이가 31km에 이르며, 인구는 2300명이 거주하는 통영을 대표하는 섬이다. 통영 삼덕항에서 32km, 뱃길로 1시간쯤 걸린다.

욕지도에 공식적인 입도가 허락된 것은 조선시대 말엽이다. 1889년 개척자들이 처음 섬에 들어왔을 때 수목이 울창하고, 골짜기마다 사슴들이 뛰어다녔다 하여 ‘녹도(鹿島)’라고도 불렀다 한다. 욕지항 안에 있는 거북이 모양의 또 다른 작은 섬이 마치 목욕하는 모습 같다고 하여 ‘욕지’라 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유배지였던 이곳에서 많은 인물들이 욕된 삶을 살다갔다 해서 ‘욕지’라 일컬었다고도 한다.

멸치 주산지인 욕지도에는 일찍부터 어업이 발달했다. 솔가지에 불을 켜서 멸치를 유인하여 잡는 ‘챗배 멸치잡이’가 주요 어법이었다. 일제가 식민지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어업 이민지 중 하나이기도 했다. 1915년경에는 조선인 2만 864명, 일본인 2127명 등 인구가 2만 3000명에 이를 정도로 섬이 번창했다.

1970년대까지 욕지도는 남해안의 유명한 어업전진기지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에는 잡는 어업보다 기르는 어업이 중심을 차지한다. 욕지 내항은 돔, 우럭 등 가두리약식장으로 가득하다, 또한 최초로 고등어 양식을 시작해 성공하기도 했다. 서울 등 뭍에서 먹는 고등어회는 거의 욕지도 산이다.

물이 잘 빠지는 황토밭이 많은 욕지도의 또다른 주산물은 고구마이다. 최고의 품질을 갖춘 고구마를 생산하고, 세척 건조 살균 포장까지 자동화로 이루어지는 시설들이 도입됐다. 특히 농산물 운반용 모노레일을 비탈진 밭 42곳에 설치하며, 욕지도 전체가 고구마 섬으로 변신했다.

최근에는 관광객들이 많아지면서, 욕지도는 통영의 대표적인 관광 섬으로 부상하고 있다. 섬 중심의 천왕산은 해발 292m로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울창하고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산 정상에는 사자바위가 있다. 산 중턱을 에두르는 일주도로를 타면 섬을 한 바퀴 빙 돌게 된다.

특히 선착장 왼편에서 시계방향으로 5분 정도 달리면 첫 번째 고개에 올라서는데, 남쪽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곳이다. 무수한 세월 동안 깎여 내린 해안 단애가 아슬아슬하면서도 탄성을 자아낸다. 남서쪽 덕동마을은 바닷물이 깨끗하고, 주변에 해수욕장과 낚시터가 있어 사철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야영이 가능하다.

삼여도는 아찔한 기암괴석들이 연출하는 욕지의 대표적 비경이다. 송곳처럼 수면을 뚫고 솟아오른 두 개의 바위가 작은 바위 하나를 감싸는 모양이다. 용왕의 세 딸이 돌로 변하며 생겨난 형상이라는 전설과 함께 ‘세 여인’이라는 뜻의 삼여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1970년대 한국영화 대표작 중 하나인 김수용 감독과 윤정희 배우의 <화려한 외출>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는데, 삼여전망대에는 그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삼여도와 유동마을을 지나, 원시림을 가로질러 10여 분 더 가다보면 지형이 바다 쪽으로 돌출한 ‘양판구미’를 만난다. 양판구미에는 ‘뉴 에덴’라는 이름의 특이한 공간이 조성되어있다. 20년 전 최숙자 선생이 위암 말기 선고를 받은 딸을 데리고 섬에 들어와, 둘이서 함께 맨손으로 건설한 믿음의 동산이다. 돌가루 반죽으로 제작한 ‘야곱의 우물’ ‘실로암’ ‘신의 제단’ ‘새벽별’ ‘신의 면류관’ 등 조각품들로 성경에 등장하는 17개 장면을 재현했다.

욕지도에는 4개의 교회가 있다. 욕지교회는 1902년에 설립됐다. 욕지도 개척민 중에 기독교 신자가 있어 호주선교사 손안론을 섬으로 초빙해 교회를 세웠고, 독립운동가 이상조를 배출하기도 했다. 1953년에는 욕지제일교회, 1975년에는 유동교회, 1980년에는 욕지서부교회가 각각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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