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사람’보다 ‘일’이나, 그 일로 얻은 ‘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60년대 몇 차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이어졌고, 매년 8% 이상의 고도성장이 뒤따랐다. 그 결과 지금 세계 10위선의 경제력을 지키고 있다. 그런 시대에는 ‘사람’보다 ‘경제’가 우선이었다. 중화학공업 육성, 수출입국 등으로 사람을 쥐어짰다. 신앙과 동일 위치에 선 경제는 어떤 가치보다 우선했고, 그것에 저해가 되면 자유나 인권도 제한받았다. 민주주의도 유보할 수 있었고, ‘개발독재’도 받아들였다. 일부지만 그것을 주도한 정치인을 지금도 그리워한다.

이런 과정에 사람은 없었다. 열 몇 시간씩 허리도 펴지 못한 채 노동현장을 지켰던 산업역군들은 노동법을 몰랐다. 그렇게 꿈을 이뤄 이제 어깨 펼라 싶은 이 나라에 경제 개발 후유증이 여전한 것 같으니 이를 어쩌랴?

음식물쓰레기 저장고에서 빠져죽고, 400kg 무게의 광케이블에 짓눌려 죽는 노동자. 기계에 끼이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전동차에 치어 죽는다. 안전장치 없는 공사현장에서 추락해도 방지할 법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안전에 뒷짐 진 책임자들은 이러저런 이유로 처벌을 피한다. 그때마다 법을 들추고 개정한다는데 뚜렷하게 처벌받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여기에 ‘사람’은 없다!

끔찍한 흑인노예의 아픈 역사는 300년 동안 계속되었다. 기독교 국가들이 저지른 악행이다. 2000만명 가까운 흑인들은 짐승이나 농기구처럼 취급당했다. 성경을 읽는 노예선 선장이 짐승처럼 운반하던 흑인들은 대서양을 건너기도 전에 이미 3분의 2가량이 죽었으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거기에도 ‘사람’은 없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사람을 존중하시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환경을 만드신 후 거기에 사람이 살도록 배려하셨다. 하나님께 사람은 가장 고귀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사람이 존중받는 역사는 오래지 않았다. 프랑스대혁명 등으로 시민의식이 발달했고, 사람과 인권이 주목받기 시작했으니.

내가 사는 세상에 사람이 있는가? 교회에는 하나님이 계셔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교회엔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 그렇게 존중받아 행복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없으면 거기엔 하나님도 계시지 않는다. 사람을 위한 목회자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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