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조폭영화가 유행하던 1990년대에 <넘버3>라는 영화가 있었다. 영화 내용은 잊었지만 배우 한석규가 연기한 ‘서태주’의 대사는 생각난다. “누가 나더러 넘버 쓰리래. 내가 넘버 투야!” 서열이 두드러진 영화 제목에 꼭 맞은 대사다.

이것이 어찌 깡패사회에만 국한될까? 우리 사회 곳곳에 이런 서열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재계 서열’이라는 것이 있다. 국가기관인 공정거래위원회가 매년 공식적으로 조사하여 발표한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서열을 학습한다. 시험을 치르면 고유 기능인 실력향상보다 서열에 눈뜬다. 그런 경쟁을 통해 들어가는 대학도 이미 서열화 되어 있다. 독일을 예를 든다면, 분야별 유명 대학이 있고 그로 인해 서열이 정해지곤 한다. 그러나 유명 학교 졸업으로 인한 메리트는 없다.

공부를 마치고 취업을 해도 기업별 서열에 따라 사람의 서열도 정해지는 듯해 씁쓸하다. 연봉이 얼마냐에 따라 서열화하는 천박한 자본의 논리는 일상이 되었다. 확실한 위계질서가 필요한 깡패 집단도 아닌데 죽도록 서열에 매달린다.

세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교회는 어떤가? 세계 제일, 아시아 최고 교회 등으로 서열을 자랑한다. 교회 내부로 들어가 보면 좀 크다 싶은 교회에서는 부목사나 장로의 서열을 따진다.

하나님께서도 교회나 사람을 서열화하실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넘버 원’ ‘넘버 투’ 같은 줄 세우기가 아닌 ‘온리 원’(only one)으로 보실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냥 ‘나’일 뿐, 어느 누구와 비교하고 서열화할 수는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나는 오직 나 하나다. 각각 독특하게 창조하시고 각자의 개성을 따라 살아가고 역할을 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하나님 앞에서 판단 받을 때도 절대적 판단일 것이다. 나를 누구와 비교하시겠는가? 굳이 비교 대상을 정한다면 나 자신일 뿐.

나의 독특함보다 너와의 경쟁 구도 속에 밀어 넣고 누가 ‘넘버 원’인가를 판단받기를 강요하고 억압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을 사는 청소년의 자살이 많다는 통계가 우리를 슬프고 또 아프게 한다. 그가 누구든 하나님 앞에서 ‘온리 원’으로 대해야 그리스도인다운 자세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