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기 교회건축문화 ‘헌신의 역사’ 품다남녀 다른 출입구 등 외형과 내부 80여 년 전 모습대로 간직 … 풍부한 역사탐방 가치 높아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한 건물에 남자와 여자의 출입구가 다르고, 좌석 또한 좌우로 구분된 예배당이 여태 남아있다는 사실부터가 흔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건물의 외형과 내부 그리고 당시 사용한 물품까지 상당부분이 80여 년 전 모습대로 간직돼있다는 점은 놀랍기만 하다.경북 의성군 구천면 용사리 소재 구천교회(홍재열 목사)의 자랑 중 하나는 1937년에 건축한 옛 예배당이다. 특히 지역 일대의 오랜 역사
어느 시대에나 개인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신한 영웅들이 존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땅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 이들 덕에 겨레의 역사도 정체성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온 세계에 자랑스러운 저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세상은 다시 어지러운데, 언제부턴가 교회가 칭찬 대신 손가락질을 받는다. 영광스러웠던 시대의 자취 몇 조각을 회상하며, 우리의 길을 회복하는 지표로 삼아보자. ① 상해독립신문과 기독교‘독립’(獨立)이라는 두 글자가 제호로 똑똑히 새겨졌다. 내 나라, 내 땅
오방 최흥종 목사와 미국인 의료선교사 포사이드(한국명 보위렴)는 호남선교역사의 앞 페이지를 장식하는 인물들이다. 복음의 불모지였던 땅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앞장섰거니와, 약한 자들 그 중에서도 한센병자들을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쳐 섬긴 공통점이 있다.특히 1909년 4월 포사이드가 길가에 버려진 한센병 소녀를 자신의 말에 태워 돌아와 정성껏 보살피고, 이를 가까이서 지켜보던 최흥종을 감화시킨 장면은 대단히 극적이다. 이후 광주 나병원, 여수 애양원, 고흥 소록도 등에서 전개된 한센병 치유사역의 결정적 계기 또한 바로 이들을
자그마한 방 안에 장정 세 명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 책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하는 가난한 청년들에게 허락된 좁은 공간, 그곳에서는 팔조차 뻗을 여유가 없다. 그 비좁은 틈에서도 독서삼매경에 빠지고, 공책에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옮겨 적으며 이들은 학구열을 불태운다. 영명의 기숙사에서는 그렇게 우리 사회와 교회를 일으킨 주역들이 자라갔다.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이 10월 28일부터 11월 29일까지 공주 충남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하는 ‘충남인의 100년 전 생활상’ 특별사진전은 근대기 우리 겨레와 기독교문화가 만나면서 빚어진 여러 독특한
6·25 당시 십자군에 참여한 이들은 대한민국을 무신론자들로부터 수호하겠다는 목적 아래 자원하였다. 중세시대의 십자군전쟁과 같이 이슬람과 인민군을 동일시하여 성전(聖戰)으로 인식하였으며, 죽든지 살든지 나라를 위해 믿는 사람들이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나라가 망해 가고 있는데 믿는 사람이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는 구국일념으로 자원하는 이가 많았다. 이왕에 군입대할 것 같으면 십자군에 가라는 가족들의 권유를 받고 지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이들은 교회, 가족, 친척 단위로 여러 명이 동시에 지원하였다. 교회 단위로 여러 명이 지원하
기독청년, 조국과 교회 위해 스스로 생명 던지다‘대한민국 수호’ 의의에 공감, 자원입대하여 헌신 … 우세현 목사, 전국 돌며 자료 발굴 힘써무공훈장증. 제30보병연대 육군일등중사 우병옥. 군번 K-1135171.이렇게 시작되는 한 장의 문서가 우세현 목사(홍은돌산교회)에게는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소중한 가보이다. 무공훈장증의 주인공은 우세현 목사가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생부이다. 아버지는 태어난 지 3개월짜리 아들을 남겨두고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이후의 나날을 힘겹게 살 수밖에 없었던 우 목사에게 어쩌면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총회신학교의 설립과 특별히 대구 시절에 대한 역사는 지금까지 어느 자료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총회신학교의 대구 역사는 일시적 공백을 메꾸는 정도가 아니었다. 우선 총회신학교는 혼돈을 거듭하던 장로교회 내에서 교회의 통일과 정통신학을 파수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총회신학교의 대구 시절에 대한 역사적 재구성을 시도해 본 결과 우선 가능한 대로 몇 가지 의의를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총회신학교 대구 시절은 단지 ‘피난신학교’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총회신학교는 전쟁 상황에 피난을 간 학교거나 아니면 임시로 세
‘포성으로 시작된 신학교’ 배움 열기 뜨거웠다1951년 9월 18일 ‘안전지대’ 대구서 개교식 … 열악한 환경에도 피난민 등 학생 몰려6·25전쟁 기간의 대구는 피난처이자 방어선의 상징과도 같았다.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도 이 시기 대구에 많은 신세를 졌다. 동란 중에도 신학생 양성 사역을 방치할 수 없었던 총회는 전쟁 발발 이듬해 대구에서 총회신학교를 개교했고, 조국과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대구·경북의 젊은 기독인들이 주축을 이룬 십자군의용대를 창설했다. 이들의 대구 활동기는 비록 2~3년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후 우리 사회와 복음
고갯길의 교회 ‘복음 불꽃’ 고을로 번져가다마로덕 선교사가 전한 천국복음, 고비마다 공동체 지켜 … 역사관 완성, 선교사명 회복2018년 성탄절 전날, 안양호 목사는 예배당 리모델링을 위한 철거작업 중이었다. 낡은 강대상 바닥을 뜯어내던 그의 손끝에 무엇인가 낯선 물체가 잡혔다. 조심조심 꺼내보니 빛바랜 책 두 권이 이끌려나왔다.한 권의 표지에는 이라는 글자와 ‘1907. 3. 25’라는 숫자가, 다른 한 권의 표지에는 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위봉교회의 역사 한 자락을
가문의 헌신, 112년 복음 역사 지켜오다설립자 강두수 믿음의 모범, 후대 신앙에 결정적 영향 … 열악한 환경에도 뿌리 이어경북 영주시 평은면 오운리는 안동과 영주를 잇는 5번국도 주변에 숨어있다. 깊은 연못을 연상시키는 지형이라 하여 붙여진 ‘연당’이라는 두 글자는 교회이름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연당교회(강경희 전도사)는 이곳에서 112년 세월을 마을사람들과 함께 지냈다. 영주지역에서는 두 번째로 1908년 탄생한 신앙공동체이다.‘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는 연당교회 설립자로 강두수 영수를 지목한다. 영주사람 강두수는 관리
경기도 김포시 공항동에 올 봄 국립항공박물관이 개관했다. 세계 항공역사와 우리나라의 항공기술 발전현황에 미래 전망까지 한 번에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야외전시장에는 초창기 대한민국 항공역사의 첫 장을 펼친 선구자들 모습을 담은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한남대학교 미술교육학과 김성용 교수가 참여해 3년여 기간에 걸쳐 제작된 이 조형물 중에는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한인비행학교를 개교할 당시 보유한 스탠더드 J-1 훈련기와 10명의 학생비행사들, 군무총장 노백린과 항공독립운동가 6명 등의 모습이 있다. 그 중 한 눈에 봐도
총회 부름에 순종, 오롯이 선교사 길을 가다명예ㆍ출세의 삶과 거리두며 미지의 대륙서 헌신 … 총회차원서 고귀한 행보 기억해야제54회 총회는 1969년 10월 10일 역사상 없던 일 한 가지를 했다. 미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다. 미국이 어떤 곳인가. 청교도의 나라,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있게 한 장로교회 감리교회들의 산실이 아니던가. 복음의 메신저에게 복음을 역수출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 된 것이다.당시 사상 첫 공식선교사로 미국에 파송된 주인공은 고 차남진 목사였다. 차남진 목사의 3남 차종율 목사(새순교회 원로)가 최근 공개한 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지난해를 기점으로 역사 속에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항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진 가운데,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기독인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포함되어 눈길을 끈다. 특히 올해 선정된 ‘이 달의 독립운동가’ 중에는 ‘윤산온(尹山溫)’이라는 한국이름을 가진 미국인 선교사 조지 새넌 맥큔(2월),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된 수원 삼일학교 교사 김세환(3월), 아내와 나란히 광복군에서 활약한 상동청년학원 출신의 오광선(4월), 두 아들과 함
애국신앙 기억하며 또다른 유관순 키워가라옥중서 숨 거두며 ‘나라에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유일한 슬픔’이라 기도‘대한독립만세!’ 함성이 서대문형무소 안에서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소리의 진원지는 유관순이 수감되어 있는 여성옥사 8호 감방이었다. 이날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딱 1주년을 맞는 날이었다.아우내장터 만세운동으로 공주지방법원에서 7년(혹은 5년)형을 선고받았던 유관순의 형기는 1919년 7월 4일 경성복심법원의 2차심에서 3년으로 줄었다. 상급심 항소를 포기함에 따라 3년형이 확정되었고, 기결수로서 유관순의 서대
자유·독립 위한 간절한 기도 불꽃 타오르다거사 전날 매봉 봉화대서 기도문 남겨…가족의 끔찍한 희생은 영예를 얻어1919년 3월 13일 서울에서 출발한 경부선 남행열차에는 일단의 소녀들이 몸을 싣고 있었다. 독립만세운동의 열기를 전국 각지로 퍼뜨리기 위해서 지방으로 향하는 이화학당의 학생들이었다. 그 무리 속에 유관순도 함께 했다.앞서 3월 5일의 서울 시위에서 체포되었던 유관순은 남산 경무총감부에 붙들려있었다. 이날 구속된 이화학당 학생들의 숫자는 28명이었으나, 선교사들이 경무총감부를 찾아가 학생들을 내놓으라며 압력을 넣어 대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