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선배들 ‘신앙과 애국’ 길을 제시하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지난해를 기점으로 역사 속에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항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진 가운데,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기독인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포함되어 눈길을 끈다. 특히 올해 선정된 ‘이 달의 독립운동가’ 중에는 ‘윤산온(尹山溫)’이라는 한국이름을 가진 미국인 선교사 조지 새넌 맥큔(2월),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된 수원 삼일학교 교사 김세환(3월), 아내와 나란히 광복군에서 활약한 상동청년학원 출신의 오광선(4월), 두 아들과 함께 의열투쟁을 벌인 감리교의 유찬희 목사(5월), 하와이에서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립해 임시정부를 후원한 강혜원(7월) 등 다섯 명의 기독교 관련 인물들이 등장한다.
신앙과 애국의 길 사이에서 저마다 다른 목소리들이 나오는 요즘 세태에, 과거 믿음의 선배들은 어떤 희생의 길을 걸었는지를 살펴보며 각자 생에 유익한 귀감으로 삼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편집자 주>

▲조지 새넌 맥큔 선교사/한국인 편에 선 벽안의 항일운동가

국가보훈처로부터 2020년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조지 새넌 맥큔 선교사, 김세환 권사, 강혜원 단장, 유찬희 목사, 오광선 장군(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국가보훈처로부터 2020년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조지 새넌 맥큔 선교사, 김세환 권사, 강혜원 단장, 유찬희 목사, 오광선 장군(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22세의 청년 조지 새넌 맥큔이 미국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한국에 온 것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의 일이었다. 평양선교부에 배치되어 숭실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1907년 평양대부흥을 목격하기도 한 맥큔 선교사가 당시 한국에 가장 절실하다 여겼던 사역은 바로 교육이었다.

1909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신성학교 교장을 맡아 본격적으로 자신의 비전을 실현시키기 시작한 맥큔은 학비가 없는 학생들도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고, 백낙준 같은 인물들이 이런 방식으로 신성학교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한국인들의 편에 서서 독립운동에 지지를 보냈던 그는 105인 사건에 연루된 이들의 구명에 앞장서는가 하면,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설교로 경찰에 불려가는 일도 겪었다.

3·1운동 당시에는 김원벽 같은 학생지도자들을 미리 만나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격려하고, 거사가 일어난 후에는 미국 잡지 기고와 언론 인터뷰 그리고 강연 등을 통해 일제의 잔학상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극단적인 배일자(排日者)’로 지목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28년 다시 내한해 평양 숭실학교 교장 직을 맡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서며 한국인의 편에 섰던 맥큔은 1936년 일제에 의해 사실상 두 번째 추방을 당한 지 5년 후, 미국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세환 권사/수원만세운동 이끈 민족대표 48인

1889년 태어난 김세환(金世煥)은 청소년기에 수원지역 최초의 교회인 수원종로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에 입문했다. 특히 교회에서 설립한 삼일학교를 통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족교육을 받으며, 애국신앙을 키워갈 수 있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10년 수원으로 돌아온 김세환은 수원상업강습소와 삼일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훗날 3·1운동의 주역이 되는 김노적 등 여러 제자들을 길러냈다.

1919년에는 박희도의 권유로 만세운동에 참여해, 수원과 충청지역 봉기를 준비하는 순회위원으로서 맹활약을 했다. 특히 자신의 제자들과 종로교회 청년학생들이 주축이 된 수원학생친목회를 중심으로 3월 1일 수원 방화수류정에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이 일로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주목받으며, 일제에 체포되었으나 1년 만에 무죄로 풀려났다.

오광선 장군이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시절 교관으로 일했던 신흥무관학교.
오광선 장군이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시절 교관으로 일했던 신흥무관학교.

출옥 후에는 곡물상 등을 운영하며, 사회활동가로서 새 출발을 했다. 기독교문화운동의 한 축이 된 조선기독교창문사 설립, 수원엡윗청년회 창립,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 조직, 신간회 수원지회 결성 등에 핵심인물로 참여하며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폐교 위기의 삼일학교를 구해내고, 수원상업학교를 설립해 교육가로서의 삶도 이어가던 김세환은 해방 후 한 달 만인 1945년 9월 26일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1968년 국립묘지 현충원 충렬대에 안장됐고, 앞서 1963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오광선 장군/아내와 나란히 독립군으로 맹활약

오광선(吳光鮮)은 경기도 용인 출신이다. 포수 출신 아버지 오인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으로 참여해 항거하다 체포된 일이 있다. 맏아들인 오광선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아내와 함께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활동했고, 나중에는 자녀들까지 가족 3대가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며 애국자 집안의 면모를 과시한다.

어린 시절 오광선은 같은 마을 태생의 애국지사 여준 선생이 세운 삼악학교를 졸업하고, 결혼 후 서울 상동청년학원으로 진학해 독립운동가로서 꿈을 키운다. 상동청년학원은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구국사업과 신교육운동의 일환으로 세운 학교로서, 주시경 노백린 이상재 남궁억 이동녕 신채호 등 애국지사들의 집합소로도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1915년 학교가 폐교되자 중국 망명길에 오른 오광선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봉오동·청산리전투 등에 참전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북경에서 첩보활동과 일본군 간부 암살 작전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2년간 옥고도 치렀다.

아내 정현숙 여사는 독립군들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며 ‘만주의 어머니’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며, 두 딸 오희영과 오희옥에 사위 신송식까지 광복군의 일원으로 활약하다 해방을 맞았다. 훗날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오광선은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고, 5년 뒤 서울에서 별세했다.

▲유찬희 목사/북간도에서 치열한 대일항쟁 전개

황해도 금천 출신의 유찬희(柳纘熙)는 감리교 선교사들이 세운 서울 배재학당에 1900년 입학한다. 배재학당에서 수학하며 민족의식을 키우고, 졸업 후에는 강원도 이천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전도사역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3년 두만강 건너 북간도로 향한다.

강혜원 단장이 무궁화로 수놓은 한반도.
강혜원 단장이 무궁화로 수놓은 한반도.

유찬희는 연길 국자가에 설립된 기독학교인 태광학교 교사로 활동하는 한편, 간민회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시작되자, 3월 13일 용정에서 13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일으켜 호응한다. 그해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도 참여하여 재무 분야를 담당한다.

특히 그는 자금 모집과 군수 지원에 있어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승리에는 유찬희의 후방지원이 큰 몫을 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이다. 이후 러시아로 거점을 옮겨 고려혁명군 조직에 힘을 쏟았다.

연해주 우스리스크에서 감리교회 목사로 선교사역과 함께 항일운동도 지속하던 그는 안타깝게도 위암에 걸린 채 1930년 귀국하고 치료 중 숨을 거두었다. 2010년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두 아들 유기석, 유기문 형제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한다. 두 사람은 목숨을 건 의열투쟁에 앞장서며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유기석에게는 200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유기문에게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각각 추서됐다.

▲강혜원 단장/미주 한인여성들 이끌고 애국운동

평양에서 태어난 강혜원은 가족들과 함께 1905년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현지 도착 후 온 가족이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1913년부터는 어머니 황마리아와 함께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하고 여성운동에 발을 내딛었다.

이 무렵 미국 본토에서 살고 있던 문필가 김성권과 중매가 이루어져, 그해 12월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부부가 세 자녀를 낳아 키우며 살아가던 1919년 고국에서 만세운동 소식이 들려왔다. 마침 미국을 방문한 도산 안창호를 만나 동기부여를 받은 강혜원은 한국인 여성들과 함께 논의한 끝에 신한부인회를 조직하고 애국운동에 돌입한다.

신한부인회는 이후 다른 지역 부인회와 통합해 대한여자애국단으로 발전한다. 강혜원은 이때 총단장을 맡았다. 한인들을 위한 구제사업, 일본상품 배척, 부녀자들의 독립사상 고취 등의 활동에도 열심이었지만, 가장 크게 공헌한 부분은 임시정부를 위한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한 일이었다. 당장 본인부터 한 시간 노동에 15센트씩 벌어 모은 돈으로 매월 3달러씩을 조국에 바쳤다.

이런 삶은 해방 후까지 지속됐다. 대한여자애국단이 조국을 위해 기부한 총액은 4만6298달러나 되는 것으로 집계된다. 1982년 5월 31일 별세한 그녀의 시신은 LA 공동묘지에서 2016년 국내로 송환되어 현재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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