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역사신학)

진정한 말씀 선포가 이뤄져야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 8세기경 로마가톨릭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겨 괴로워하여 클라우디오 디 토리노(Claudio I di Torino, 약 871년 사망)는 미신적 삶을 살고 있는 교회를 향해 <변증서>(Apology)를 썼다. 이미 로마가톨릭교회는 부패한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교회가 양의 탈을 쓴 늑대였기 때문이다. 또 그 이유는 787년 2차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형상숭배를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명백하게 정죄한 것을 인간이 도가 지나칠 정도로 어긴다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단체임을 스스로 자명한 셈이다.

종교개혁 시기엔 예배당에 새겨진 많은 동상들과 화상들이 급진파에 의해 파괴되거나 소멸됐다. 외형적 우상도 성경이 엄격히 금지하고 있지만 내면적 우상을 우리는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개혁신학에서는 형상에 대한 것을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2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이 질문은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107~110문),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49~52문) 및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96~98문)에서 동일하게 묻는 질문이다. 대답은 이렇다. 어떤 방식으로든 형상화해선 안 되고 형상화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예술적 감각으로 피조물을 형상화 할 수 있지만(<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97문) 하나님을 형상화 해선 안 된다. 분명한 이유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형상에 대한 핑계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성육신 하셨다고 한다. 또 법궤를 만들 때 스랍의 형상을 만들도록 하나님께서 명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누구도 그분을 그리지 않았고, 지역마다 예술가마다 다른 그림으로 그린다면 이것 역시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또 구약성경 시대에 만든 놋 뱀이나 법궤 역시 현존하지 않는다. 인간이 그것에 무슨 능력이 있는 줄 알고 숭배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핑계를 대는데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당시 교회의 상황에서 교육을 받지 않은 자를 위해 형상 사용을 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었다(<기독교강요> 1권 11장 5항). 만일 교육을 위해 형상 사용을 당시에 허용했다면 그 이후로 왜 교육을 시켜서 형상숭배가 되지 않도록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한국교회에서도 어린이 교육을 위해 하나님을 만화로 만들거나 간단한 그림을 그려 사용한다는데 과연 2계명에 비춰 볼 때 가능할까? 이것은 개혁신앙의 고백이 결코 아니다. “참된 하나님께서 경배를 받으실 방법은 그분에 의해 제정되고 계시되고 그분의 의지에 의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을 어떤 가시적인 표현 아래 또는 성경에 묘사되지 않은 다른 방법과 인간의 상상, 고안 또는 사탄의 제안들에 따라 경배를 받아선 안 된다”고 명백히 밝힌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2항).

또 “그림들은 백성들을 위한 책으로서 묵인해도 될까?”라고 묻고(<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98문) 그 답변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하나님보다 우리가 더 현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 못하는 우상을 통해 그분의 백성들이 배우기를 원치 않으시고, 그분의 말씀의 생생한 선포로 배우길 원한다”고 명백히 밝힌다. 정말 신앙교육을 원한다면 세속적으로 고안된 교육이 아니라 기도와 진정한 말씀 선포로 해야 한다. 교육현장에서 형상이나 화상 사용은 엄히 다스려야 하고 금지되어야 한다.

2계명에서 하나님께서 금지하는 것은? “선한 의도나 선한 체”하며 고안하여 영이신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고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여 계명을 슬그머니 어기도록 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지 않은 어떤 종교적 예배를 고안하는 모든 것, 권하는 것, 명하는 것, 사용하는 것, 그리고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9문). 요즘 각 교회 내에서 자행하는 것을 철저하게 반성해야 한다. 성경을 제각기 해석하여 형상만 아니라 예배 형식마저 변형시키는 행위는 2계명에서 엄히 금지시키고 있다. 아니 죄라고 명한다. 이것은 우리의 재간이고 재주이다. 무엇을 위해 예배 형식을 고안하는지에 대해선 자신의 양심이 증명할 것이다. 그래도 알아듣지 못하면 그릇된 양심을 가진 자가 아닐 수 없다 하겠다.
2계명에 대해 핑계대고 억지 부리는 자에 대해 부속시킨 이유는? 하나님은 자신을 예배에 대해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계신다. 이에 거역하는 행위를 ‘영적 간음’이라 명한다. 이런 행위에 대해선 “복수적 진노”를 나타내신다고 부속시키는 것이다(고전 10:20~22; 신 32:16~20). “이 계명을 어기는 자들은 그분을 증오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고, 여러 세대에 이르기까지 형벌로 위협하신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0문).

2계명에 대한 개혁신앙의 자세는? 진정으로 2계명을 지키는 것은 가시적으로 웅장하거나 엄숙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척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선포를 진정으로 행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2계명을 어기는데서 돌아서려면 진정한 말씀 선포가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부패한 성품을 지니고 있기에 언제든 가시적 고안물들을 자신의 아집과 한량한 경험에 의지해서 자신만 아니라 선량한 무리들까지 하나님의 복들을 지상에서 즐기지 못하도록 하게 된다. 이 두려운 명령을 우리는 진정으로 지키고 있는지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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