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훈 목사(익산 고현교회)

먼저 예수 앞에 문제를 들고 와야 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담대히 기도할 때 감당할 수 없는 난제도 뚫어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하룻밤을 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신 예수님은 남아 있던 제자들이 난처한 처지에 놓여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벙어리귀신 들린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였고, 그 결과 거기에 모인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고쳐주지 못했습니까?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매우 중요한 진리를 교훈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병을 예수께서 고치시는 과정에 있어서 우리는 불가능한 인간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그 삶의 비밀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1. 예수님 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19절을 보면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버지는 난치의 질병을 앓고 있는 아이를 데리고 먼저 누구를 찾아 왔습니까?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때 예수님은 변화산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부탁했지만 제자들은 그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막 6:12~13절에 보면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남아 있던 제자들은 과거 한때에 받았던 은혜나 믿음만 기대하고 자신들의 과거를 과신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병을 고친 경험이 있었던 그들은 자기들의 영웅심에 치우쳐 주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종종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어떤 어려움 속에 빠진 사람들이나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에 한번 나와 보세요. 하나님 의지하시면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문제에 대한 해결의 희망을 안고 전도를 받은 대로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에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이 교회에 나와서 참 하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그들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제가 강조하는 것은 교회에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의 책임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책임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제자훈련과 성경공부를 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자훈련이나 성경공부의 목적을 단순한 지식의 획득에 두는 것은 가장 나쁜 방법인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성경은 교회의 주인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단순한 건물이나 어떤 마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건물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특별한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구성하는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이 예수 이름으로 모여 주의 이름을 높이며 예배하는 그곳에 우리 하나님이 임재하실 줄 믿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예배를 통해 임재하신 주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어떤 문제의 해결을 놓고 기도할 때, 보편적으로 갖는 기대 가운데 하나는 영적 지도자들의 도움입니다. 저는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지도자의 역할은 우리 성도들이 진정한 목자이신 주님을 만나볼 수 있도록 설교로, 교육으로, 훈련으로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는 길이요, 예수가 진리요, 예수가 생명이십니다. 그분만이 홀로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가지고 예수 앞에 나올 때 우리는 불가능을 넘어서서 나 자신을 이기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능력의 삶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2.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28절을 보면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합니다. 지금 제자들은 병 고침을 실패한 후였기에 주님께 조용히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아이의 병이 고쳐지지 못한 이유를 이미 19절에서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라는 말씀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제자들에게 “주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 때, 어찌 예수님을 향한 어느 정도의 믿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왜 실패한 것일까요? 우리가 ‘믿는다’고 말할 때 중요한 것은 믿음이란 단어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믿음의 대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실패의 원인은 제자들이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유혹에 빠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인 우리가 도울 수 없더라도 신실하신 주님은 확실하게 도와주실 줄을 믿습니다.

 

3. 기도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7장에도 본문과 똑같은 기사가 취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17:21절에 보면 본문의 요절 부분이 ‘없음’으로 표시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본을 인용해 “기도와 금식이 아니고서는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별도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기도와 함께 금식까지 함께 강조하고 있습니다. 금식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가장 집착하는 것, 하루를 살면서 절대로 빼놓지 않는 것 그것은 바로 먹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식사마저 일정기간 단절하고 간절히 부르짖는 것을 금식기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가장 간절한 형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금식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본문 29절로 돌아가 보면 “이르시되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가 이런 문제를 돌파 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대교회가 당대의 세계를 흔들 수 있었던 영향력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로 기도에 있었습니다. 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던 그 기도가 세계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때로는 나의 힘, 나의 지혜, 나의 생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난제들을 뚫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주님을 신뢰하고 기도의 놀라운 경험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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