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주필

3·1운동은 국내외에서 다수의 임시정부를 태동시켰다. 이들 중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임시의정원, 경성의 한성정부 등이 대표적인 임시정부였다. 이들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통일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데 공감하고, 연해주 지역의 이주민들을 기반으로 조직된 대한국민회의와 망명한 지도자들이 세운 임시의정원 사이에서 논의하고 있었다.

이들의 통합 논의 속에서 가장 커다란 쟁점이 된 것이 통합임시정부를 어디에다 두어야 할 것인가였다. 당시 이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된 것은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는 대한국민의회와 외교독립론 및 실력양성론을 주장하는 임시의정원의 운동 방침 결정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들은 통합의 동력을 찾는다. 그것은 두 단체 모두 공화주의를 표방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두 임시정부에 추대된 지도자들의 상당부분이 겹치고 있다는 것도 통합의 동력이 되고 있었다.

1919년 11월 삼권분립과 공화제에 입각한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고 국무총리에 이동휘가 추대된다. 당시 연해주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대한국민의회 계열의 무장투쟁론자들과 북경에서 활동하던 의열투쟁론의 지도자 단재 신채호 등은 외교독립론을 주장하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파리 강화회의와 워싱턴 회의에 조선문제를 위해 김규식을 책임자로 하는 파리위원회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구미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이 회의에서 식민지 조선의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못한다.

참담한 상황 속에서 저들은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장래를 위하여 전체회의를 개최했다. 국내외 단체 120명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장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진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진통을 겪었고, 결국 세 파로 나누어진다.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자는 창조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 기존정부를 그대로 두자는 고수파로 나뉘어져 서로 다투다 아무 성과 없이 마무리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다양한 방법론에 입각해 1910년대에 있었던 조국광복운동을 통합해 조직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의 결렬로 임시정부는 초창기의 동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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