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택 목사(발안제일교회)

지금 한국사회는 심각한 위기를 만났습니다.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격차는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수백조의 거액을 쌓아 놓고 있으면서 감세를 바라는 대기업이 있고, 그들의 갑질에 허덕이는 중소기업, 소상공인, 노동자, 농민 그리고 실업자가 된 청년들의 사회적 분배구조의 갈등은 심화되어가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불어오는 경제 불황의 늪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도 너무나 심각한 난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5가지의 단계별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1단계인 생리욕구(식욕, 성욕, 수면욕 등), 2단계인 안전욕구(개체 생존의 안정 보장감), 3단계인 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구(사회 귀속 욕구), 4단계인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명예욕 등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 5단계인 자기실현의 욕구(최고의 인간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구)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1~4단계인 저차원적인 욕구를 단계적으로 충족하길 원하고 최종적으로는 5단계인 자기실현의 욕구를 충족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묻지마 살인사건, 몽둥이로 길가는 노인, 처녀를 무차별로 때려 눕혀 버리는 분노표출의 사건 등은 인간이 이러한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지 못할 때 느끼는 감정들이 분노로 표출되어 일어난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으니 책상이나 벽을 주먹으로 치거나 온갖 집기를 걷어차 버리기도 합니다. 청년시절 오뚝이를 망치로 때리고, 샌드백을 주먹으로 한방씩 날렸던 기억이 나기도 합니다.

사회를 배격코자 하는 세력들이 가장 즐겨 쓰는 슬로건 중에 하나가 (젊은이여, 대중들이여)“분노하라, 간혹 분노가 쌓이면 참지 말고 있는 대로 표출하라!”라고 합니다. ‘대중심리학’의 이론들이 한국사회에 실제로 나타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으니 이 어찌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러한 분노의 대상이 자기와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며 이런 사람들에게 무차별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이 나라가 어쩌다가 이지경까지 이르도록 사회, 정치, 경제, 종교, 교육 지도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이제라도 기초를 다시 쌓는 심정으로, 황무한 땅을 개간하는 심정으로,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고, 느헤미야처럼 나라의 패망을 보면서 함께 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울음소리가 들리십니까?

예수님 당시의 사회구조는 어떠했습니까? 또한 초대교회 시대는 어떠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과부, 고아가 이 거리 저 거리,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고 다녔겠습니까? 그러나 너무나 감사한 일은 당시 성령 충만을 받은 많이 소유한 자들이 밭을 팔고 집을 팔아 사도들 발 앞에 가지고 왔으니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나누어 주고 그 일이 고된 노역(?)처럼 힘들어 일곱집사를 세워 분배토록 하고 하나도 내 것이라 하는 자가 없이 서로 유무상통(有無相通)했으니 이런 일은 우리에게 꿈만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 옛날이여’ 노래만 부르고 있어야 할까요?

다비다는 여제자로서 주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비다 시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제자 다비다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을 지어주고,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비다에게도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질병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녀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녀의 죽음을 가슴아파했던 그곳에 있던 제자들이 다른 지역에 있던 베드로를 급히 초청했고, 베드로가 도착하였을 때 동네의 많은 여인들이 울면서 베드로를 찾아와 다비다가 자신들에게 베풀었던 선행과 사랑에 대해 전하며 다비다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때 다비다가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는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비다 같은 여제자가 너무나 절실히 필요합니다. 아니 많이 가지지 못해서 선행과 구제의 능력이 부족하다해도 함께 얼싸안아 울고, 함께 등을 어루만지는 그런 위로자(comforter)가 필요합니다. 반가움이나 호감을 사기 위한 형식적이고 잘나빠진 허깅(Hugging)같은 가식적인 모습이 아닌 함께 얼싸안고 울고 웃는 그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전달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다비다! 이 여인의 아름다운 선행은 당시 가난한 대중의 가슴속에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했고, 또 그 선행이 하늘에 상달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 멋진 다비다의 모습이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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