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목회자들에 대한 일반교인 일반사회의 기대는 남다르다. 윤리의식이나 도덕적 실천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일반교인들과 사회인들보다 월등하기를 바라는 것이 이 사회의 정서이다. 다시말해 본이 되는 삶을 살아서 존경의 대상이 되어 달라는 것이 저들의 기대치이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자들의 윤리의식이 되살아나야 한다. 우린 여기서 예수님의 지도자상을 다시 한번 마음에 담아야 한다.

예수님의 윤리의식은 당시 유대사회의 상류층이었던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에 대한 혹독한 비판에서 찾아야 한다. 주님의 자비로움은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까지 용서해준데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위선의 길을 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화있을 것을 선언하시면서 지옥의 자식을 만드는자요, 소경의 인도자요, 율법을 빙자하여 의와 인과 신을 버리는 형식주의자, 회칠한 무덤이요, 의인과 선지자를 죽이는 뱀들이요,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혹독한 책망을 가하셨다. 저들은 중죄자들이 아닌 당시 유대사회의 전통적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계 지도자들이었다. 왜 예수 그리스도는 저들을 이처럼 책망하셨는가? 그것은 저들이 한마디로 종교적위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위선자들 중 가장 악한 자들이 종교적 위선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예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마음 속의 품성과 그 속에서 나오는 선한 행실이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자 “한손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윤리는 결과론적 윤리가 아닌 동기나 심성의 윤리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먼저 선한 나무가 되어야 선한 열매가 가득하다고 강조하신 것이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지도자의 윤리의식이 들어있다. 선하고 깨끗한 동기에서 선한 성품에서 나오는 선행이 기독교의 윤리의식이어야 하고 이것이 목회자의 윤리의식이어야 한다. 그리고 지도자가 되려면 일찍부터 철저한 자기관리를 해야 함이 국가 공직자 인사청문회에서 똑똑히 보아왔지 않은가? 자기 관리가 안된 사람은 총회나 노회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서기관 및 바리새인들은 지도자의 자질을 상실한 자들이었기에 예수께서 혹독한 책망을 가한 것이었다.

목회자는 주의 종이다. 그 종이 미화되거나 격상되어 지나치게 높아진 것이 작금의 현실이 아닌가? 목회자가 위선자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군림하면 안 된다. 섬기는 것이 주의 종의 자세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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