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왕 목사(수원제일교회)

예수처럼 섬김으로 낮아져야 합니다
날마다 자아가 죽고 겸손히 낮아지는 것이 영광에 이르는 길

 

사람은 각기 나름대로 자기가 하는 일에 최고가 되기를 원합니다. 전문 산악인의 최대 소망은 해발 8000m 이상의 히말라야 14본좌를 완등 하는 것이고,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는 세계 신기록을 갱신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에도 정복해야 할 최고봉이 있을까요? 만일 있다면 그것은 정반대로 최고로 높은 정상을 정복하는 일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아가 죽고, 겸손히 낮아지되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때까지 낮아지는 것이 기독교의 최고봉일 것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인 열정을 앞세우는 광신만이 아니라 정반대로 이성만을 앞세우는 차가운 이성주의도 부인합니다.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머리로는 바로 알고 가슴으로는 열심히 믿는 균형을 이룬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아는 지식이 하나가 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여기서 ‘하나가’라는 말(eJnovth, 헤노테스)은 ‘통일, 연합,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어느 개인이나 교회나 시대를 막론하고 이 같은 균형이 깨졌을 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서 불건전한 신앙과 신학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과 아는 것이 균형을 이룬 온전한 믿음이 왜 필요할까요? 그와 같은 믿음의 균형이 이루어질 때만이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바로 믿음을 수 없고, 또한 온전한 신앙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바로 알 때만이 그리스도를 바로 믿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만큼 그리스도를 본받고 닮으려는 믿음이 바로 믿는 믿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리스도를 박식하게 잘 아노라 하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를 본받고자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고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같은 신 바리새주의자라면 이것이 오늘날 보수주의를 지향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과오 중에 하나입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은 자기 비하였습니다. 원래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연약한 인간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최고의 위치에 계신 분이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최고의 경지가 어떤 모습인지를 가장 절실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만일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셨다면 구태여 삼십 삼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은 불과 여섯 시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정시대 신사참배에 굴복한 다수의 목회자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나약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모진 고문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신사에 참배하지 않았지만 집요하게 오랫동안 회유하고 압박하고 핍박하는 과정에서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고 합니다.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공포의 본질은 마지막 한 순간이 아니라 기나긴 죽음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여섯 시간 이전에 삼십 삼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십자가 고난의 연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한 인간을 섬기는 일을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마지막까지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그와 같은 섬김은 당신의 성품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된 우리에게 본을 보여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섬김입니다.(요 13:14,15)
 

그리스도를 본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본받아 실천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죽음에 이른 인간을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 섬김이라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과 동등 된 자리에서 가장 낮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기까지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데 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때로는 그렇게 사시고 그렇게 죽으시고 장사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비천하게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卑下)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기를 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그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본받아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계는 물론 나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물론 신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지만 이 세대를 본받아 영적 역주행을 하는 길을 가고 있지 않습니까?

(막 10: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한 형제끼리 이 세대의 풍조를 그대로 본받은 판박이가 되어 이권다툼과 기득권 고수를 위해 이전투구(泥田鬪狗)하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뉴스거리가 되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세인에게 조롱을 당하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다시 영광스러운 교회로 회복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오늘 성경을 통해 예수께서 주시는 말씀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일치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막 10:44)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사랑하는 교역자와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의 해답이요, 대안이요, 길입니다. 예수께서 본래 하나님이셨으나 성육신하여 낮아지시고, 지극히 의로우신 독생자가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고, 영생이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하늘 높이 계시던 이가 무덤에 장사되어 낮아지기까지 인간을 섬기신 것을 가슴 깊이 새겨 예수를 본받는 판박이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예수님의 섬김은 하나도 헛되지 않고 마침내 천상천하 온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높은 이가 없도록 지극히 높으신 영광의 자리에 이르고야 마셨습니다.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이제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만 하지 말고 그 예수님처럼 섬김의 자리로 낮아지는 것만이 신앙인의 최고봉인 영광의 자리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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