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왕 목사(수원제일교회)

삶의 현장 적극 찾는 ‘아름다운 발’ 됩시다
절망의 시대 ‘희망의 배달부’ 넘어 말씀을 녹여 삶으로 보여주어야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만나는 사람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나눕니다. 만일 우리가 새해만이 아니라 일 년 내내 서로를 축복하고 세워주고 기쁨을 주는 말을 한다면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어느 면으로나 별로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복음을 전하는 교회도 많고 복음을 다양한 방법으로 전하는 목회자와 전도자들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점점 더 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그 대안이 있을까요?
 

구약 시대의 희망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다가도 사소한 말 한마디와 이해관계 때문에 사랑을 증오로 바꿔 버립니다.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자신의 이익을 따라 배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더더욱 살벌해지고 절망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당신을 배반한 인간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고 그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으며, 끝까지 그 약속을 지키시어 당신의 신실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약속이 창 3장 15절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구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시고 그의 후손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 나라에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 세상에 어떻게 오실 것인지에 대해 좀 더 구체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인해 고통하며 절망하는 인간을 위해 각 시대마다 ‘희망의 배달부’를 보내어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는데 바로 구약 시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로부터 그와 같은 희망의 기쁜 소식을 약속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상 아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배은망덕한 죄에 빠짐으로 멸망을 자초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럴 때마다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선지자들을 배달부로 보내어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그와 같은 경고를 듣고 돌이켜 회개하여 멸망을 피하라고 경고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변함없이 사랑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심판 중에 고통하며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희망의 배달부’인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선지자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이사야입니다.
 

신약 시대의 희망

이스라엘 백성은 각 시대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의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서도 하나님의 기대와 달리 고집을 부리며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의 운명은 다 끝난 것처럼 보였으나 끝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서 새 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한 후 4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통 중에서 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를 ‘희망의 배달부’로 마리아를 찾아왔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전해 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니 약속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희망의 배달부가 아니라 ‘희망, 기쁨, 사랑, 생명, 축복’ 그 자체이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절망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원흉인 사단을 십자가와 부활로 이기시고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어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그 같은 구원의 축복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절망하는 인생들에게 널리 전해주어야 할 희망 배달부가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구약 시대처럼 또 다른 선지자를 세우거나 가브리엘과 같은 천사를 동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사명을 또 다른 희망의 배달부를 통해서 전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절망하는 시대에 큰 기쁜의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 새로운 희망의 배달부로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어느 누구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르심을 받고, 가르침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방방곡곡에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진 것은 그와 같은 ‘희망의 배달부’를 훈련하고 양성하고 파송하여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희망 발전소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희망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죄악은 점점 더 극심해지고 고통하며 절망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꼭 필요한 사람은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줄 ‘희망의 배달부’입니다.

전국 교회들마다 갖가지 교육과 훈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전도 운동을 벌리고 멀리 이방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합니다. ‘주여!’ 삼창하는 기도 소리가 금요일 밤마다 어둔 하늘을 찌를 듯이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더 세상은 우울한 소식들이 많아지고 온갖 악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교회들마다 환히 밝혀야 할 사랑의 등불이 하나 둘 꺼져가고 그 안에서 분쟁과 불화와 갈등으로 인한 불길이 화마처럼 솟구치고 있습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절망하는 이 시대를 위해 오늘의 교회는 세상을 행복하게 밝히는 전력을 공급하는 희망 발전소가 되어야만 하는 때가 바로 지금 이 시대입니다. 이 때 목회자와 성도들은 예전처럼 전통적인 설교나 전도지만으로 절망하는 이시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새로운 각성과 준비와 도전이 필요한 때입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이 당시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잔혹하게 박해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주를 배반하지 않고 굳건히 믿음을 지키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절망의 탄식 소리가 아니라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 되라고 당부한 오늘 성경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롬 10: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은 세례 요한처럼 광야의 외치는 자의 공허한 소리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온 백성에게 미칠 희망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듣기에 좋은 소리만을 전하는 입이 아니라 사랑을 삶으로 녹여 사람들에게 그 기쁨을 나누는 ‘아름다운 발’이셨습니다.


절망이 가득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목회자이든지, 선교사이든지, 직분자이든지, 평신도이든지, 기쁨의 좋은 소식인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희망의 배달부’로 만족하지 말고 그 예수님의 말씀을 삶으로 녹여 내어 절망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삶으로 보여주는 ‘아름다운 발’이어야 합니다.

이를 테면 예수님의 사랑을 소리로만이 아니라 사랑의 발이 되고, 겸손이 말로만이 아니라 발이 되고, 강단에서 교회에서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친히 오신 주님처럼 절망하는 사람들이 탄식하는 삶의 현장으로 찾아나서는 ‘아름다운 발’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말이나 글이나 물질이 아닌 각자의 삶으로 증거하는 복된 소식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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