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폐리제독이 네 척의 함대를 이끌고 와서 함포사격을 함으로 막부체제가 무너지는 대외 위기를 맞은 것이 19세기의 일본이었다. 때는 1854년이었다. 서구적 충격 이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60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역사에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이 된다. 19세기 세계열강은 제국주의를 부르짖으면서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1875년 일본은 쿠릴열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면서 1879년에는 규슈제도를 통합하기에 이른다. 갑오전쟁으로 알려진 청일전쟁 이후인 1895년 대만을 얻은 일제는 1905년에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사할린 섬의 북위 50도 이남지역을 얻어내면서 랴오둥 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였다.

당시 서구 열강의 대표적인 영국이나 프랑스는 저들의 식민지가 지리적으로 머나먼 지역에 편중되어 있었다. 일본이 지배한 식민지들은 서구열강이 지배한 식민지와는 그 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 단적인 예가 일본 식민지는 문자를 사용하는 문명국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문명국의 이점은 사회 문화적 통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저들은 식민지를 자신들의 영토에 편입시키면서 자기 나라의 헌법과 법률로 다스렸다. 그 예가 훗카이도와 오키나와였다. 또 하나의 예는 타이완처럼 특수지역으로 지정해 총독을 파견하여 자신들의 법을 적용시켜나가는 방식이었다. 또 하나의 다른 방식이 조선통치였다. 일제는 시종일관 일본헌법을 적용하지 않고 특수 지역으로 분류 독자적인 법률로 다스렸다. 또 다른 방식의 통치가 1932년 세워진 만주국의 예였다. 저들은 만주국은 대외적으로는 독립국가적 위상을 유지시키는 교활함으로 통치했다. 잔악한 일본은 경찰과 교사를 일본인으로 세우는 직접통치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식민의 동화에 박차를 가했다. 일시동인(一視同仁)과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조선식민동화를 위한 경구였다.

일제는 조선을 영구지배할 목적으로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마수는 조선인들의 저항운동에 부딪치면서 좌절된다. 당시 일제는 조선인 대표를 일본의회에 참석시키지 않았고 지방자치와 같은 낮은 수준의 자리도 허락하지 않은 채 기본권 모두를 박탈한 말 그대로 노예착취로 조선을 짓밟았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한 것이나 프랑스가 알제리를 지배하면서 내세웠던 동화주의와는 그 궤를 달리했던 것이 일본제국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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