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산정현교회)

나는, 내 형제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나의 침묵 속에 죽어가는 이 땅의 이웃들에게 적극 다가가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본문 9절에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이 나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런데 3장의 같은 9절에도 하나님의 질문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의 아버지인 아담에게 던지신 질문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여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주시는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먼저 3장 9절의 질문을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을 먹어 두려움에 떨며 숨어있는 아담에게 주신 질문입니다. 아담의 위치를 물으십니다.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을까요? 물리적 위치를 물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손수 고귀하게 창조하신 아담이 생소해 보입니다. “너 아담 맞느냐? 내가 창조한 그 아담은 도대체 어디 있는지?” 고귀하게 창조하신 그 아담은 어디 가고 없고, 먹는 것 때문에 초라해진 아담이냐는 것입니다.

이런 느낌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사랑하는 예쁜 나의 아이들. 그런데 이제 다 자랐다 싶었는데 내 아이 같지가 않습니다. ‘내 아들은 어디 있지, 내 딸은 어디 있지?’ 생긴 것은 내 아들이고 내 딸이 확실하긴 한데 아무리 봐도 내 아들도, 내 딸도 아닌 것 같은 생소한 그런 느낌 혹시 느껴보셨나요? ‘내 자식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싶은 그런 마음 말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봅시다. 한 여인을 사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해 10여 년쯤 지났는데, 예전의 그 여인의 모습을 찾기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이 사람이 그때 그 사람이 맞는지 싶습니다. 많이 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난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 자리가 아닌데 거기에 자리를 잡습니다. 위치가 잘못되었습니다. 내 길이 아닌데 가고 있습니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지요.

교회를 향해서도 ‘어디에 있냐’고 묻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디로 방향을 잡았느냐고 묻습니다. 교회가 많아졌지만 더 이상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어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5만개라고 자랑하는 한국교회를 뒤지고 다니시면서 “교회야 넌 어디 있니?”라고 물으신다면... 아무리 봐도 교회다운 교회가 보이지 않아 답답해하신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요? 과연 우리는 ‘여기 주님이 찾으시는 교회가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갔는데 주님이 묻습니다. “넌 어디 있다 왔니? 뭘 하다 왔니?” “주님 내가 목산데요, 얼마나 많은 일했는데요.” “얼마나 큰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모았는데요.” 그런데 주님께서 “글쎄 난 널 본 적이 없는데, 내가 원하는 자리에 넌 한 번도 있지 않았는데”라면 어떻게 할까요?
우리는 어디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자리에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 질문해 봅시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두 번째 질문을 봅시다. 4장에서는 아담의 아들 가인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두 질문의 공통점은 모두 ‘어디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어디 있냐’는 질문은 현재의 나의 형편,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 내가 가는 길을 점검하게 하는 도전입니다.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웃에게 눈을 돌리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 형제로 여겨 살피며 돕고 위로해 주어야 할 사람을 곁에 두고도,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고 있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말입니다.

얼마 전 서울 송파에서 있었던 ‘세 모녀의 자살’로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가면 안 되겠다며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고 언론도 요란을 떨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었나요? 또 다른 세 모녀의 자살이 여전히 계속 되고 있습니다. 우리 이웃이 외롭게 죽고 오랜 기간 시신이 방치되는 고독사 문제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이런 우리 사회는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이런 사회가 선진국 운운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을 자랑하는 것은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요?

희망을 잃고 눈물을 흘리는 우리의 이웃이 있는데 과연 우리는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그들이 어디 있는지를 묻는 것은 그들을 찾아 본 적이 있는지? 그리고 그들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 희망을 갖도록 격려해 준 적이 있냐?는 질문입니다.

착한 동생인 아벨을 죽인 가인처럼 오늘 이 시대의 가인인 우리는 형제를 짓밟고, 이웃의 눈물을 담보하여 내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밀린 월급을 받지 못해 슬퍼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눈물을 주님이 보고 계십니다. 불법체류자라는 불리한 신분을 악용하여 착취하고, 그래서 얻은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는 가증스러운 모습에 주님은 분노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아우 같은 북한이 어디 있느냐고 묻기도 하십니다. 인권은 짓밟히고, 성경책을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공개처형 당하는 우리 아우는 어디 있냐고 물으십니다. 중국 등 동남아 곳곳을 불안한 마음으로 떠돌아다니는 탈북자들이 어디 있냐고 묻고 계십니다.

착한 소비에 대한 의식이 커가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우리에게 그것은 기호식품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존이 달려 있는 것임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공정무역이라는 방식을 통해 생산자에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보장해 주고 수입한 커피를 마시려고 애쓰는 것도 “아우가 어디 있는지”를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답일 수도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이런 질문 앞에 뻔뻔스러운 대답을 합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우리도 이렇게 대답하지는 않는지요? 우리는 세 모녀를 ‘내가 죽이지 않았다’ 또는 ‘내 책임 아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내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가난은 나랏님도 구하지 못하는 것인데요?’ 이렇게 반문하며 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내게서 찾고 계십니다. 왜 나에게 물으실까요? 내가 그들이 눈물 흘리는 같은 시대, 같은 땅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 곁에서 이웃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웃인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책임을 묻습니다. 내가 죽이진 않았지만 내가 침묵하는 동안 또 다른 아벨은 계속 죽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부흥에 몰두하고 화려한 예배당 건물에 매달리는 동안 외로워하는 우리의 또 다른 아벨인 농어촌의 교회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 거대한 예배당에 과연 주님이 계시긴 할까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합시다. “나는 어디 있는지?”, “내 아우는 어디 있는지?” 그래서 내가 행복해지고, 우리 사회가 따뜻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흥했다고 자랑하던 한국교회가 어느새 주춤거리고 추락하는 모습을 많이 보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비아냥거리고 조롱하는 소리도 유난히 크게 들립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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