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학교)

오늘도 답습하는 조상의 죄, 회개해야
‘한국적 기독교’ 미명 아래 그릇된 관습과 관행 경계 늦추지 말아야

 

 

어릴 때 교회당에서 밤새 기도하시던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고 있다. 또 여기저기서 많은 부흥사경회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들었던 설교들과 분위기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들은 이따금 국가를 위한 기도를 하곤 했다. 국가를 위한 기도! 그것에 대한 근거로서 다니엘 9장을 제시했다. 특별히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단 9:16)와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단 9:20)였다.

 
국가를 위한 기도

우리는 대체적으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2)는 말씀에 따라 국가의 안녕을 위해 기도한다. 여기에서는 기독교인들을 위한 기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와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단체이다. 국가가 무력을 통해서라도 인간의 불법과 부정을 다스리도록 그분은 허락하셨다. 비록 비기독교인이거나, 원하지 않는 지도자들이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공적 권위를 가진 그들의 명령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 기독교인은 복종해야 한다(<기독교강요> 4권 20장 23항; 벨지카 신앙고백서 36항 참고). 기독교인인 동시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의 모든 자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 해야 한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그런 안녕 속에 우리의 경건이 잘 유지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아무튼 국가를 위한 기도는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다니엘이나 예레미야, 이사야, 모세까지 조상과 관련한 죄들에 대한 기도를 하곤 했는데 어떤 의미일까? 특별히 다니엘은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단 9:20)한다. 예레미야는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고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렘 14:20)라고 한다. 그리고 시편 104~106편에서는 창조자 하나님(104편), 구원자 하나님(105편) 및 구속자 하나님(106편)을 설명하기 위해 창조의 이야기, 이집트로 내려가는 이야기, 출애굽 및 가나안의 역사를 살피면서 해석한다. 더욱이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을 자세히 상술하면서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고 한다. 단순한 교훈을 위해 과거의 역사를 살폈을까? 그런 의미도 없지 않지만 그런 뜻에만 우리의 신앙이 멈춰서 있어선 안 된다.

 
다니엘 9장

조상의 실패한 불신앙을 보고 경고를 받아 우리는 바른 생활을 해야겠다는 교훈에만 머문다면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 지나온 역사들을 상술하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 가운데 조상의 죄들을 언급하는 참 뜻을 다니엘 9장을 통해서 찾아보도록 하자.

다니엘 9장은 그의 기도문이다. 때는 메데의 아하수에로(Xerxes) 왕 아들 다리오의 치리 1년(기원전 539~538년)이다. 다리오 왕은 바벨론 나라를 몰락시킨 자로, 다니엘 6~11장의 배경이 되는 인물이다. 다리오의 부친 아하수에로는 에스더의 남편 아하수에로(기원전 519~465년)와는 다른 인물이다. 일반 역사에선 그를 다리오 1세 또는 대제 다리오(기원전 약 550~486년)라 부른다. 그의 치리 1년이라 했으니 역사적 상황이 바뀐 시점임을 알 수 있다. 이때 다니엘은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2절)라고 했다. 아마 예레미야 25장 11~12절과 29장 10절이라 여긴다. 그 내용은 70년이 끝나면 바벨론 왕과 그 나라를 폐하시리라는 것이다. 바벨론 나라가 망한 후 새로운 나라가 일어나자, 다니엘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니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그 말씀을 읽었고 무언가를 깨달았다. 나이든 다니엘은 기나긴 기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3절).

그의 기도 내용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죄들을 하나님께 고하는 것이었다. 선지자들을 통해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고관과 조상들과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6절) 듣지 않았음을 회개했다. 과거 예루살렘이 망한 이유가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들의 죄악으로”(16절) 말미암았다는 고백을 하였다. 그리고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단 9:20)했다. 과거 조상들의 죄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주위 국가들로부터 수치를 당하고 바벨론 포로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조상의 죄들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들까지 함께 고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상의 죄들

조상의 죄들로 후손들이 고생을 당했다고 하면,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각 사람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니라”(대하 25:4; 신 24:16)는 말씀과 충돌을 빚고 만다. 다니엘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와 타락 때문에 후손이 힘든 것임을 나타내려 의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조상들처럼 자신과 이스라엘이 변함없이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나타내려 의도했다. 이것이 다니엘에겐 너무나 슬픈 이야기이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니 70년이 차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알게 된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해야할 감동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여호야김 3년(기원전 약 605년), 포로가 된 다니엘은 친구들과 함께 바벨론에서 타향살이를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높은 지위를 얻었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늘 위협을 받으며 살았다. 아마도 바벨론이 망하면서 귀국의 희망을 보는 듯싶었지만 곧 아님을 알게 되었다. 70년! 정말 먼 세월이었다. 나이 든 다니엘은 결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임을 지각하고 하나님 앞에 오늘의 기도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포로로 잡혀 오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과 부패는 다니엘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 것이다. 조금 더 나은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이런 면은 에스겔 선지자의 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거짓 선지자, 거짓 목자, 거짓 고관들에 관해 에스겔은 매우 신랄하게 비판한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 몰락 전에 지적했던 거짓 지도자들이 바벨론 포로 기간에도 동일하게 행하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있던 다니엘은 심정이 찢어지듯이 아팠다. 그래서 다니엘은 먼저 자신과 조상의 죄들에 대해 하나님께 회개했다. 조상들의 범죄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당시의 백성들이 변함없이 범죄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회개한 것이다.

조상의 죄들은 곧 다니엘 시대 이후 역사 속에 있었던 가식적이고, 이름뿐인 기독교인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누가 비기독교인이며, 선택된 자들이지만 중생하지 않은 자이며, 유기된 자로 중생한 자들처럼 행동하고, 선택받고 중생했지만 연약해서 세속인들과 다를 바 없이 그릇되게 행하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그러니 지도자로서 더욱 심정이 아픈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죄는

현 한국 교회의 신자들에게 조상의 죄들이란 과거 복음이 전파되기 전 행했던 우상숭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당에 출석하면서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처럼 삶의 변화가 없는 채로 행하고 있다. 이것은 조상들의 행위를 따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들의 관습과 풍습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한국적 기독교’라는 허울 좋은 미명 아래 온갖 세속적인 것들을 교회 문화에 접목시킨다. 아직도 세속적 관습을 벗지도 못한 자가 조심하지 않고 여과 없이 교회 일원으로 들어와 교회들을 혼동시키고 있다. 한국 문화의 행사들을 마치 한국적 기독교처럼 말하면서 조상의 죄들을 답습하고 있는 현실이다.

문화만 아니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분파, 기복, 학벌, 물량, 족벌, 세습 등 갖가지 세상 풍습이 교회에 들어왔다. 설상가상으로 감성주의와 번영신학이 어울리면서 성경 구석에 나타나는 몇몇 구절들을 짜깁기 하여 자신들이 행하는 풍습들의 정당성을 억지 주장한다. 이것이 다니엘이 말한 조상의 죄들이다. 교회 정치를 세속 정치와 다를 바 없이 여기는 매우 그릇된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한다. 도덕 수준이 바닥에 떨어지는 이유는 조상의 죄들을 답습하는 우리 자신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다니엘은 우리에게 외친다. 한국 문화와 풍습에 찌들인 관행들을 깡그리 벗어버릴 순 없더라도 경계와 주의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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