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영환 교수(총신대학교)

무제한 욕망의 결과는 허무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 2차 세계대전은 모더니즘이 가지고 있던 이상을 철저하게 파괴시켜버렸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류는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성으로 일어난 운동이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해체’ 혹은 ‘다양성의 추구’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필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해체를 추구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의 특징이 다양성에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지금도 여전히 인류는 ‘하나의 보편적인 세계관(a single, universal world-view)’을 꿈꾸고 있다. 현재 논의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쟁은 단지 무엇이 중심이 될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파워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지금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행기에 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패러다임을 토대로 현재 일어나는 사회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이후,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가 ‘세계의 블록화’이다. 유럽연합(European Union), 동남아 국가연합(ASEAN),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 북미자유무역협정(North America Free Trade Agreement) 등에서 보는 것처럼 세계는 블록화 되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은 중소기업의 다양한 물품 보다는 대기업이 주는 안정감에 만족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형마트가 재래시장을 잠식해가는 현상은 다양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여 진다.

따라서 다양성에 대한 추구를 포스트모던의 현상으로 본다면 현재 이루어지는 사회현상들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필자는 이러한 다양성에 대한 관심을 하나의 거대 정신이 팽창되어 균열되어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현상이라고 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대체하는 하나의 사상이 아닌 한계에 다다른 모더니즘이 자기고발을 통해 다시 한 번 더 자신을 강화시키려는 시도이다. 한상화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이러한 역설적인 관계를 주목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커다란 사상적 흐름 속에 자리하며 그 자체 내에서 방향전환을 통한 극복을 추구하는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과 결국 인간 이성의 중심성에서 출발한 전제들은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의 결말을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스텐리 그랜츠(Stanley Grenz)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토대 위에서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보았다. 지아니 바띠모(Gianni VAttimo)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 종말이란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의미가 아니라 종말을 경험하고 있는 상태라고 주장하였다.

지금 우리는 하나의 1000년대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1000년대가 시작된 시점에 살고 있다. 지난 수백 년간 인류역사를 지탱하던 모더니즘이라는 가치가 균열되어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되었고, 거대담론에 대한 거부를 그 특징으로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불을 당긴 사상 가운데 하나가 ‘해체주의’인데, 이것이 추구하는 것은 사실상 해체(deconstruction)가 아니라 ‘재건(reconstruction)’이다. 이들은 거대담론이라는 것이 힘을 가진 자에 의해서 규정되어 왔기 때문에 지식의 왜곡이 생긴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왜곡을 분해해서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원래 의도이다. 따라서 20세기가 걸어온 해체의 과정은 새로운 힘을 추구하기 위한 시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혼돈의 시기를 살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20세기 이후 서구를 중심으로 나타난 예술의 담론들은 큰 혼돈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혼돈의 중심에는 상대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어떤 것의 옳고 그름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일어나는 지역과 문화 안의 문제일 뿐, 그것을 벗어나는 초문화적인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이상 어떤 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이 되어 버렸다.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하면 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신으로부터 자유를 선언한 인간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선택과 관련된 모든 속박과 제한을 철폐하고 있다. 앞 장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예술은 하고 싶은 것을 제한 없이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허용된 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욕망이 무제한적으로 승인된 결과는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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