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개혁의 시대(기독신문 지령 1001~1500호)

GMS 창립, 선교역량 강화 … ‘미완의 개혁’ 제비뽑기 시작


1 외환위기 속 선교역량 강화

“정책·협력선교 시대 개막” “21세기 한국교회의 해외선교를 ‘정책과 협력의 선교 시대’로 이끌어 갈 총회세계선교회가 11월 18일 왕성교회에서 역사적인 창립총회를 가졌다.”

▲ 외환위기 속에서도 GMS는 건실하게 성장해 나갔다. GMS가 2000년에 개최한 선교대회 모습.

본지 1998년 11월 25일자 1229호 첫 머리글과 기사 내용이다. 기자의 표현대로 총회세계선교회(GMS) 태동은 ‘역사’였다. 1998년 11월 18일 국가부도라는 외환위기 IMF사태 속에서 해외선교에 매진하겠다는 인식 자체가 무모해 보였을 것이다. 당시 선교단체마다 선교사 귀환조치를 단행하고 기관마다 기구를 축소시켰다. 그래서 선교단체 설립을 우려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총회는 상비부였던 선교부를 확대시켜 선교회를 조직한 것이다.

당시 본지는 “교단선교부로는 미국 남침례회에 이어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총회세계선교회는 이번 선교회의 전환을 계기로 그 규모를 한층 확대했다”고 평가했다. 본지의 지적대로 GMS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당시 860여명 이었던 선교사는 설립 5년 만에 1000명 시대를 열었다. 이는 한국교회 최초의 일이다. 이어 2008년에는 2000명 시대를 열었으며, 2015년 2월 현재 100개국 1306가정 2374명의 선교사가 복음의 씨앗을 심고 있다.
   
2 미완의 개혁, 제비뽑기

21세기를 열면서 총회 선거제도에 개혁의 바람이 불었다. 본지는 제비뽑기가 결정된 2000년 9월 제85회 총회를 평가하면서 “총회가 총회임원 선거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채택한 것은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전례없는 초유의 일로써 획기적인 사건”(2000년 10월 4일자 1315호)이라고 보도했다.

▲ 제86회 총회에서 고 한명수 목사가 제비뽑기 당선 구슬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실 총회선거에 대한 개혁의 열망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1994년 5월 26일 총회임원 전국노회장 연석회의에서는 “선거관련 향응과 금품제공 거부하겠다”고 다짐했으며, 1995년 5월에는 총회임원회가 선거풍토를 쇄신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선거문화를 바꾸고 공영선거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갈망은 해를 거듭할수록 커졌다. 그리고 그 열매로 2000년 제비뽑기 도입이라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1년 뒤인 제86회에서 총회 역사상 최초로 제비뽑기 선거제도가 실시됐다. 9월 19일 총회 이튿날 선거관리위원회가 주관하여 치른 임원선거는 우여곡절 끝에 제비뽑기 임원선거를 채택, 목사 부총회장에 한명수 목사(수원노회·창훈대교회)가 당선됐다.

이렇게 시작한 제비뽑기는 10년이 지나면서 산하기관과 일부 노회로 확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제비뽑기에 대한 문제점들도 하나둘씩 나타난 것도 사실이다. 제비뽑기 도입 초기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총회 리더십이 문제가 된 것이다. 결국 2014년 9월 제99회 총회에서는 제비뽑기와 직선제가 절충된 선거가 실시됐다. 사실상 제비뽑기는 13년 만에 미완의 개혁으로 끝을 맺은 것이다.
 
3 개혁신학 요람 영광과 그늘

▲ 총신대가 1998년 사당캠퍼스 종합관을 준공하고 개혁신학의 요람으로 거듭났다.

1994년 5월 14일(1020) “9일 총신 양지도서관 역사적 준공, 신학대학원 중 최대…30만 장서 가능, 교단 교회·성도 등 헌신 결과”1998년 3월 4일(1194) “총신대 종합관 “우뚝 서다” 2년 2개월만에 새모습…2일 준공감사예배”

1994년 5월 총신 양지도서관이 준공됐다. 4년 뒤 1998년 3월에는 총신대 종합관이 새로 들어섰다. 개혁신학의 요람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021호에서는 총신대가 학장 선임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가 첫 머리를 장식하고, 1997년 10월 8일자 1176호에서는 ‘총신 사당캠퍼스 두동강 위기’라는 충격적인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동작구청이 종합관 뒤편으로 신설도로를 내겠다고 밝힌 것.

이런 가운데 교육부는 총신에 세례교인만 서류를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삭제할 것을 요구(1075)하기도 했으며, 재단이사와 총장 선출로 몸살을 앓고(1273, 1277, 1498), 총신화합수습위원회가 구성되기도 했으며(1364), 제85회 총회에서는 이사 전원을 총사퇴 시키라는 결의도(1315) 있었다.

이뿐이랴. 미주총신 사태(1103)도 있었으며, 칼빈대 사태(1389, 1479)도 있었다. 특히 1999년 10월에는 대신대 학생들이 학교 교문을 폐쇄하고 전면파업에 들어가는 충격적인 일도 있었다.
 
4 연합의 바람 불다

이때만큼 연합이 절실했던 적도 없었다. 그래서 부활절 연합예배가 성사되고, 교단장협의회도 구성됐다. IMF사태 때에는 9개 교단이 연합해 구국기도회를 개최하고, 장로교대회가 정상궤도에 올라섰다. 기독교TV(1048호 기독교 유선(CA)TV 주식 공모)와 기독교교도소 아가페(1192호 기독교교도소 설립 준비)의 시작도 연합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연합은 이상향에 불과한 것일까? 1990년대의 남북갈등은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쳐 보수권(한기총)과 진보권(교회협)의 높은 벽을 실감케 했다.
 
5 총회주일 실시

▲ 1996년에 가결된 총회주일헌금은 교단 발전의 가교역할을 하고, 총회사업의 기틀이 되었다.

질문, 1월 셋째 주일은? 정답은 총회주일이다. 총회주일은 1996년 제81회 총회에서 가결된 사항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부터 총회주일이 필요함이 제기됐었다. 1995년 11월 9일 총회임원회는 총회주일을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곧바로 전국 노회장을 불러 총회주일을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1996년 9월 총회에서는 교단적 결의로 확정짓고, 곧바로 이듬해 1월부터 실시했다. “전국의 많은 성도들이 교단의 발전을 위해 기도하고 총회사업을 위해 헌금했다.”(1997년 1월 22일자, 1463호)
이렇게 실시된 총회주일 세례교인헌금(의무부담금)은 상승 분위기를 타 ‘전국교회 총회주일 실시’(1330)하고 1388호에서는 ‘세례교인헌금이 자리를 잡았다(66.3%)’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6 통일교 문집단, 단월드 골치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한국교회를 괴롭혔던 것은 ‘이단문제’였다. 특히 당시에는 통일교 문집단의 활동이 극에 달했다. 통일교는 기독교와 비슷한 단체를 만들어 눈속임을 했으며(1181) 심지어는 정치권에도 깊숙이 관여했다(1452호 통일교 가정당 침투).

뇌호흡으로 전국적인 바람을 일으켰던 단월드는 단군을 조상신으로 모셨다. 특히 학교나 관공서에 단군상 제작을 주도하고, 이를 저지하던 목회자가 실형을 받는 사건도 발생했었다.
이밖에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파문, 정명석(JMS), 안상홍증인회(하나님의교회), 말씀보존학회 등도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7 총회교육 전성시대 열다

▲ 1990년대와 2000년대는 총회교육의 전성시대였다. 1998년 5월 18일 총회교육부가 주최한 여름성경학교 지도자강습회가 충현교회에서 진행됐다.

1000호가 시작했던 1993년 11월부터 현재까지 본지 보도의 특징 중 하나가 총회교육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이다. 총신대 관련 기사뿐만 아니라 전국주일학교 행사(전국대회, 교사대회, 교사수양회), SCE수련회도 줄곧 1면을 장식했다.

특히 눈여겨 볼만한 것은 1994년 3월 12일자 1012호 기사다. 본지는 머리글에서 ‘총회 공과 개편작업 본격화’를 실었다. 교육부는 총회공과교육과정연구위원회를 발족하고 공과 개편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1998년 12월 드디어 계단공과 <말씀·믿음·삶>이 출간됐으며, 2001년 8월 31일에는 계단공과 완간예배를 드렸다.

교육의 열정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2010년 11월 사용자 중심의 신공과 <생명의 빛>이 첫선을 보였으며, 총회교육의 성숙도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8 사회문제 집중

1000호(1993년 11월 27일)부터 1500호(2004년 9월 8일) 기간 동안 본지는 사회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인간 존엄성 문제(1148호 유전자복제 인간존엄 중대한 모독, 1150호 교계 유전자복제 반대움직임 활발)와 국가고시 주일실시 반대(1046, 1047, 1319, 1323) 움직임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이밖에 심야영업과 뇌사인정, 인간게놈, 의약분업, 주5일근무, 사형제도, 안락사(생명윤리기본법), 사립학교법, 일본교과서 왜곡 등도 중대 관심사였다.
 
9 구호활동 활발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1995년 4월 28일 대구지하철 공사현장 폭발,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1997년 12월 대한민국 외환위기(IMF사태), 1999년 8월 21일 터키 지진, 2003년 9월 태풍 매미….
끝없는 사건과 사고, 잇따른 수해와 지진으로 대한민국과 세계는 몸살을 앓았다. 이런 때 한국교회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었다. 재해 현장에 가장 빨리 찾아가 고난과 비통에 빠진 이웃을 돌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눴다.

10 북한에 사랑 전하다

1994년 7월 북한 김일성의 사망과 더불어 ‘고난의 행군’이 시작했다. 각종 재해와 경제난으로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을 돕고자 한국교회가 팔을 걷어 올렸다. 쏟아지는 탈북자를 돕기 위해 국내외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탈북자의 난민지위 인정을 위해 서명운동도 벌였다. 또한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주민을 돕기 위해 구호식량을 보내고, 총회는 북한에 밀가루 보내기와 빵공장 건립을 협력했다. 한국교회는 효과적인 북한구호를 위해 지원 창구를 단일화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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