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학교)

하나님의 비밀적 계획에 순종합시다
예정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이해할 수 없는 것, 섣부른 판단 멈춰야
 

 

 

이해가 아닌 설명

‘자발적 무지’, ‘잔인한 무지’ 또는 ‘유식한 무지’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이런 단어는 예정과 관련되어 가끔 나타난다. 자발적 무지(libenter ignorare)란, 천사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칼빈 선생이 언급한 단어이다(『기독교강요』 1권 14장 3항). 이것은 성경, 신조 또는 교리에서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을 말한다. 이 지식에 머무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기에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릇된 자들은 상상력을 동원하는 경우가 있기에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전해야 한다.

이에 반해 잔인한 무지(bruta inscitia)는 예정을 본격적으로 설명하면서 사용한 단어로서, 인간 이해에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아예 무지로 일관하겠다는 의미이다.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차라리 알려고도 하지 않으려는 자세이다. 이와 같은 반항적 자세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무지를 통해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로마 가톨릭이나 불신자들이 잘 사용하는 것이다. 유식한 무지(docta ignorantia)란 아우구스티누스가 사용한 단어로 호기심으로 알려고 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자제한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말하고, 침묵하는 곳에서 침묵하겠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성경적이고 그 이상을 넘어가지 않겠다는 것이니 자발적 무지와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다(3권 21장 5항). 이것은 실제로 우리 삶에 늘 일어나는 일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섭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겠다.
 

에베소서 1장

예정에 관련된 대표적 성경적 본문은 에베소서 1장이다. 우리를 택하심이 ‘창세전’(엡 1:4)이라 하셨는데 이 의미는 시간 개념이라기보다 우리 편에서 어떠한 가치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세전이란, 무시간 개념이거나 하나님의 시간 개념이기 때문이다. 아르미니우스파와 같이 예지를 주장하는 자들은 이것을 인간적 시간으로 계산하거나, 우리의 이해의 틀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설명하려 하지만 미련한 행위이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한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그 기쁘신 뜻대로”(엡 1:5)라고 말씀한다. 이 의미는 인간이 자신 안에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선택에 대한 모든 근거들을 뒤집어엎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모든 공로를 제쳐놓으라는 의미고, 무슨 공로를 보고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성경이 우리에게 선포하는 것은 우리는 예정에 관해 알 수 없다는 것이고, 단지 예정적 선택과 유기가 있다는 사실만 알 뿐이라는 것이다. 또 무슨 조건이나 재능에 따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주권에 따른 것이기에 비밀적 예정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할 뿐이다. 그 이유와 판단 또는 내용은 우리의 지성으로 알지 못한다.

 
로마서 9장

또 예정과 관련된 본문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로마서 9장이다. 사도 바울은 예정을 설명하기 위해 예레미야, 호세아, 이사야를 언급한다. 먼저 로마서 9장을 보면, 혈통으로의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천명한다(롬 9:6).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롬 9:7)고 한다. 육신적 관점으로 어떤 자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고, 다른 자를 유기하셨다고 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두 실례를 드는데 하나는 이삭과 이스마엘이고, 다른 하나는 야곱과 에서이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태어난 후 각각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가 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선택 역시 하나님의 비밀적 계획 속에 이뤄지지만 자칫하면 예지로 이뤄졌다고 오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리브가의 두 자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선택과 유기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롬 9:11). 여기서도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의 상상이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고, 단지 우리는 그분의 주권을 신뢰하면서 살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어떤 공로나 장점을 고려하시지 않으시기에 무상적 은혜이고, 비밀적 선택이기에 교만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선택은 겸손한 삶을 위한 진리고 그분을 신뢰하는 삶을 위한 진리임을 말해준다.


예레미야 18~19장

예레미야 18장은 로마서 9장에서 언급한 토기장이의 이야기가 담겨 있고, 19장에선 토기장이가 만든 옹기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하나님의 계획은 옹기를 만드는 토기장이처럼 그분의 주권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토기와 옹기에 해당되는 유다 백성의 범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교만을 지적하는 것이다(렘 19:15).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유와 근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비밀적 예정이 드러나는 경우 누구도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인간이 행동하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비밀적이고 우리는 자발적으로 범죄하여 그 예정의 결과를 맞이할 뿐이다. 필연적인 동시에 자발적이라는 칼빈 선생의 설명이 잘 드러난다 하겠다(2권 2장 7항). 하나님의 예정을 단순히 선택과 유기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보다 폭넓게 우리 삶에 적용시켜보자.


운 또는 우연?

예정 교리는 우리의 운명이 정해졌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숙명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차이점은 숙명은 이미 정해진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예정은 이미 정해진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칼빈 선생은 섭리를 설명하면서 운과 우연이란 단어는 불신자들의 용어라고 선언한다(1권 16장 2항).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또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정했기 때문이다. 때와 이유는 그분의 영역이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그분의 예정을 신뢰할 뿐 무엇임을 신뢰하진 않는다. 이처럼 숙명은 무엇임을 신뢰하지만 예정은 그분의 속성을 신뢰한다. 무엇이 일어날는지, 왜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분을 신뢰하기에 실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담대하게 직면한 어려움들을 헤쳐 나간다.

 
불가해적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비밀적인데 이 의미는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알 수 없고 부분적으로 아는 지식이다. 그 부분적 지식이 바른 것이기에 그분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부분적 지식으로 그분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또 예정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인간 측면에 서서 설득시키거나 이해하려 한다. 이런 자세를 ‘예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 입장에서 볼 때 이해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행동하겠느냐는 식이다. 이것은 그분의 본질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이다. 우리는 피조물이지만 그분은 창조자시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경건한 삶의 시작이다. 그분의 무한하심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그분이 알리신 것 외에는 알 수 없다. 알려진 정도로만 가지고도 그분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부단히 설득시키려 하지만 진리는 설득과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포와 설명에 있다. 그것의 방법에 따라 전달이 잘 이뤄질 수 있겠으나 그 결과는 오직 성령의 사역에 달려있다. 이것 역시 비밀이다. 구원의 사역이 비밀적이지만 부르심을 통해 하나씩 드러난다.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호기심으로 바벨탑을 쌓는 것에 반해 경건한 자들은 자발적 무지로 만족하고 유식한 무지의 자리에 머물려고 한다. 그렇다고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여 잔인한 무지를 억지 주장해선 안 된다. 불가해적(incomprehensible)일 순 있어도 불가지적(unknown)이진 않기 때문이다.

 
겸손을 위하다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가 비밀적이기에 누구도 알 수 없다면 우리의 섣부른 판단을 멈춰야 한다. 자신과 타인의 선택과 유기만 아니라 일상적인 일들의 판단 자체도 자제해야 한다. 조금의 기도 생활로 무엇을 안다고 섣불리 행동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그분이 환경을 통해 나타내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요구될 뿐이다. 그분이 주시는 확신은 우리의 지성(mind)에 있지 않고 심정(heart)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고 있는지 냉정하게 살펴야 한다. 호기심에 만족하려는 잔인한 무지를 내려놓고 그분의 비밀적 계획에 우리의 믿음의 닻을 내리다가도 바람처럼 움직이면 그때 닻과 돛을 올려 순종하며 또 겸손하게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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