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삼 교수는 ‘한 손에는 기독신앙을, 한 손에는 학문’을 삶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 대표적인 기독 지식인이다. 1959년 정읍성광교회를 헌당한 고 양재열 장로와 유화례 선교사의 양딸이었던 김행이 권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신앙생활과 양할머니 유화례 선교사의 삶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진학한 후 동대학원 경영학 석사 과정에 이어 웨스턴일리노이주립대학,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원을 거쳐 연세대학교 대학원(경영학 박사)과 총신대학교(M. Div., Th.M.)에서 수학했다. 한양대학교에서 경영학부 교수와 경상대 학장, 산업경영대학원 원장을 거쳐 현재 연변과학기술대학교 총장으로서 학자이자 경영자의 삶을 걷는 동시에, 수많은 기독교 저서를 집필하는 기독지성인이며 동시에 목사로 헌신해오고 있다. 양 교수가 집필한 주요 기독교 서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 어떻게 할 것인가>, <기독인의 윤리의식과 성경윤리>, <영성회복의 신앙>, <당신의 영성을 깨워라>, <자본주의 문화와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 <기독교와 현대사회>, <단순한 믿음이 주는 기쁨>, <교회행정학>, <교회경영학>, <기독교교육행정> 등이 있다.


“총회 살리기 고민하던 어른들 소개로
오랜 친구 <기독신문>과 우정 맺었죠”

부친 양재열 장로의 총회 재건 돕던 대학생 시절 창간초기 신문에 시 ‘출애굽기’ 싣고 인연
학자와 목회자의 삶 이후 한국교회 고민 나누며 동행… “각별한 애정만큼 더 단단해지길”

“소금처럼 녹아지고 빛처럼 빛을 줌으로 사라지는 삶, 그것이 기독교인의 삶이 아니겠습니다.”
1965월 2월 15일자 <기독신문> 지면에 ‘출애굽기’라는 제목의 시가 게재됐다. <기독신문>에 이 시를 기고한 이는 당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대학생이자 창신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양창삼 청년이었다. 사회적으로는 군사정권의 독재와 교회적으로는 교단 분열로 혼란하던 시절, 스무 살에 막 들어선 기독청년이었던 그는 내외적인 고난과 시련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의 염원을 출애굽에 빗대어 한 편의 시로 풀어냈다.(시 원문 참조)
 
‘사랑의동산’과 양재열 장로

▲ <기독신문> 2대 이사장 양재열 장로(왼쪽)와 <기독신문>에 ‘출애굽기’를 게재할 당시 20대 양창삼 교수(오른쪽).

“1959년 총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합동과 통합 두 갈래로 갈라진 후, 총회와 총회 산하 교회는 물론 신학교와 교단 언론 등을 살리기 위한 소위 ‘총회 살리기 운동’이 당시 전국의 기독실업인인 장로님들을 중심으로 구성됐던 ‘사랑의 동산’이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진행됐습니다. 교단 분열 후 <파숫군>이라는 이름으로 교단언론이 명맥을 이어가던 중 1965년 <기독신문>이 창간될 수 있었던 것도 ‘사랑의 동산’ 회원들의 지원과 후원 덕분이었습니다.”

양창삼 청년은 당시 ‘사랑의 동산’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양재열 장로의 아들이었다. 양재열 장로가 총회에 헌신하게 된 것에는 수피아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유화례 선교사(Florence E. Root)의 양딸이었던 아내 김행이 권사의 영향이 컸다. 김행이 권사는 17살 되던 해 유화례 선교사를 만나 그녀의 도움으로 이일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된 것을 계기로, 유 선교사의 양딸로 평생을 섬겼다. 한국전쟁 직후 유화례 선교사가 빌려준 6000환에 더해 양재열 장로는 전 재산을 헌납해 정읍성광교회를 짓는데 앞장섰다. 이후 양재열 장로는 서울에서 인쇄사업을 하면서 전국의 주요 기독실업인들을 모아 한국기독실업인회(CBMC)를 창립했다. 그리고 한국기독실업인회에 참여했던 장로님들은 교파를 초월해 교단 분열로 어려움을 겪던 총회 살리기에 의기투합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양창삼 청년은 한국기독실업인회의 성경공부 모임을 위해 해외에서 출간된 ‘제자화 운동’에 관련된 서적들을 번역하는 일을 도맡았고, 집에는 총회 살리기를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장로님들과 목사님들로 늘 북적이고 있어 자연스레 총회와 관련된 일을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총회 살리기의 일환으로 <기독신문>이 창간되자, 당시 그가 취미로 시를 쓴다는 것을 알고 있던 총회 어르신들이 “신문에 시 한편 써보는 것은 어떠냐”는 권유로 ‘출애굽기’라는 시를 쓰게 된 것이다.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손

 

이후 아버지 양재열 장로가 <기독신문> 2대 이사장과 총신대 재단이사, 총회 회계 등 총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동안, 양창삼 청년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은 후 미국 연방정부 공무원의 삶을 만족스레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할머니’라 부르며 따르던 유화례 선교사가 죽음을 앞두고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손자에게 “내 손자가 미국에서 편안히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한국을 위해 일하라”고 따끔하게 충고했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했던 유화례 선교사의 충고에 충격과 부끄러움을 느낀 양창삼 청년은 그 길로 한국행을 결심했다. 한국에 돌아와 한양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로 초빙된 그는 교수로 일하는 동시에, 총신대학교 야간부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게 됐다. 양창삼 교수는 “당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그는 학자이자 목회자로 ‘하나님께로 이끌린 삶’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로 그는 대학생 시절 시를 게재했던 <기독신문>에 때로는 논설위원으로, 때로는 시인으로 수많은 글을 기재하며 50년을 함께 걸어왔다. 양창삼 교수는 “1997년 <기독신문>이 옥한흠 목사님이 회장으로 섬기던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와 함께 ‘한국교회 성장정체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포럼을 개최할 때 한국교회 성장 정체 현상에 대해 주제발표를 했는데, 그 내용을 바탕으로 <기독신문>에서 <교회성장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만큼 양창삼 교수에게 <기독신문>은 참으로 오래된 친구이다.
 
기독신문 직접 배달하기도

양창삼 교수는 “교단이 분열되기 전에는 아버지가 교단지를 받아 정읍 시내에 배포하는 일을 하셨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아버지와 함께 기차역에서 신문을 받아와 주요 관공서에 매주 직접 신문배달을 다녔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며 “교단분열 이후 교단 소식을 알리기 위해 <파숫군>이 나왔을 때도, <파숫군>에 이어 <기독신문>이 교단지가 된 후에도 지금까지 매주 <기독신문>을 받아보고 있다”며 신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했다. 50년 세월을 <기독신문>과 함께해 온 양 교수는 “앞으로 <기독신문>이 객관적이고 정확한 사실 보도와 더불어 감동적인 기사 발굴에 앞장서고, 목회자들에게는 미래세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복음의 정체성을 확고히 세울 수 있게 돕고, 주일학교 교사와 신학생 등 일반인 독자들 또한 즐겨볼 수 있는 신문으로 발돋움해 나가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현재 연변과학기술대학교 총장(Chancellor)으로 섬기고 있는 양창삼 교수는 “연변과학기술대학교가 하나님의 학교로 자리매김하고 보다 창의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인프라 구축에 힘쓸 것”이라고 비전을 밝혔다. 덧붙여 양창삼 교수는 “몇 년 전 서서평 선교사의 전기를 다룬 <조선을 섬긴 행복>이라는 책을 쓰면서 서서평 선교사처럼 성공을 쫓는 삶이 아닌 주님과 이웃을 위해 섬기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 깨달았다”며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의 선배들처럼 매순간 낮아지고 주님만 높이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자 한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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