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교회는 고통 당하는 인간들에게 내세의 소망을 제공하면서 일탈과 갱신을 반복하고 있었다. 기독교 정신은 중세의 뿌리였고 열매였다. 이러한 중세의 중심에 교황이 있었다.

그러나 중세기의 교황들 중 다수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를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수준 이하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시기가 800년대였다. 800년대 이후 교회의 구조적 부패와 성직자들의 자질이 중세를 몰락시킨 요인이었다. 이런 현상은 중세 중반이 되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4세기의 성자 안토니우스나 6세기의 성자 베네딕트가 수도원에서 가르쳤던 영적 덕목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변질되었고 급기야 실종되는 비극을 맞는다. 8세기 이후 다수의 수도사들은 영적 일에는 등한시 하면서 금전과 토지 등 재산 축적에 몰입하여 하늘왕국보다 세속왕국을 더 사랑하고 있었다. 주교들의 경우는 교회 직제를 사고팔면서 부패의 늪으로 빠져들어갔다.

성직매매를 뜻하는 시모니(Simony)는 영적인 신분을 돈으로 사고자 했던 사도행전의 마술사 시몬의 행위에서 유래된 것인데, 이것이 중세에서 더 유행되면서 교회를 추락시키고 있었다. 교회가 소유한 토지는 봉건제를 통해 마을 농민들이 경작하고 있었다. 따라서 교회는 마을 주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곳으로 전락하였다. 세금의 부과는 흉년에도 아랑곳없이 무거운 세액이 되어 농민들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 결국 이러한 일들은 반성직주의로 이어져 교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팽배해지고 있었다. 여기에 반해 하급 사제들의 생활은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뿐만 아니었다. 교육도 불충분하여 일반 평민과 별 차이 없이 무지한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롬바르드족 지배 아래 있다가 샤를마뉴 대제에게 복속되었고 다시 봉건제 아래 여러 공국들로 분열되었다. 롬바르드의 일파인 스폴레토 공국은 로마의 오른쪽에 위치하여 늘 교황정의 정치에 개입하여 말 그대로 권력을 농락하였다. 869년 스데반 6세가 교황이 되었는데 스폴레토 가문을 등에 업고 교황직에 오른 것이었다. 스데반 6세는 이미 사망한 전임 교황 포모수스를 재판하겠다면서 그의 무덤을 파헤쳐 죽은 지 7개월 된 시체를 꺼내 교황의 옷을 입힌 채 피고석에 앉힌 정신질환자였다. 스데반 6세는 죽은 포모수스에게 유죄 선고를 내렸고 시신은 길거리에 던져졌다. 이렇게 중세는 엽기적인 지도자에 의하여 쇠퇴의 길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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