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 선교 130주년 기념포럼 25일 열려

알렌·언더우드·아펜젤러 신앙 유산 재조명
“근대화 기틀 다지며 현지인 삶에 구체적 헌신”

한국 기독교 선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포럼이 4월 25일 새문안교회(이수영 목사)에서 열렸다. ‘초기 세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주제로 열린 이번 포럼은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를 재조명하고 그 신앙의 유산을 되짚어보는 시간이 됐다. 특별히 포럼이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첫 번째 한국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에서 열려 그 의미가 더 깊었다. 참석자들은 포럼을 주의 깊게 들으며 한국교회가 순수했던 이들의 신앙을 다시 배우고 참된 부흥의 길을 걷게 되길 마음을 모았다.

▲ 한국 기독교 선교 130주년 대회 기념포럼에서 발제자들이 세 명의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이번 포럼은 한국교회가 신앙의 선배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잡는 시간이 됐다.
한국 근대화와 알렌

1884년 9월 인천에 도착한 한국 최초의 미국 선교사인 알렌(1858~1932)은 한국에 체류한 21년 중 3년여 동안만 선교사로 일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한국과 미국의 외교관으로 지냈지만, 선교사의 정신과 사명감으로 한국을 섬겼다.

백석대학교 민경배 교수는 “의사로서 고종에서부터 민비, 그의 왕자까지도 자주 만날 수 있었던 알렌은 조선 최고층에서 선교를 시작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다”며 “뿐만 아니라 여러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 일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고, 백성들을 위한 병원을 세우고 의학교육을 시키는 등 하류층을 위한 사역에도 힘을 쏟았다”고 말했다. 덧붙여 알렌은 미국 근대문명의 시설을 한국에 설치하고 미국과의 친선을 유지하며 일본이 한국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막는 역할까지도 감당했다.

조선 왕실의 알렌에 대한 편애는 다른 선교사들의 질투 아닌 질투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민 교수는 “한 때 알렌이 미국에 체류하다 한국에 와서 머물 곳을 찾았는데, 선교사들이 이를 거절한 사건도 있었다”며 “선교사들도 결국 인간”이었음을 설명했다.

안양대학교 이은선 교수 역시 “최근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알렌이 서양 우월주의, 제국주의에 편승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외교관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나오고 있다”며 “이런 주장들을 객관적으로 비판하는 관점도 필요한 시점”이라도 덧붙였다.

언더우드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언더우드(1859~1916)를 비롯해 당시 한국을 찾았던 많은 선교사들은 학교 사역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눈에 이들은 낯선 이방인이자 ‘서양귀신’일 뿐이어서, 많은 조선인들이 이들을 꺼렸다. 그러다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승리한 뒤 서양문물을 바라보는 일반 대중의 인식이 크게 달라졌으며, 무엇보다도 창궐하는 전염병 속에서도 자신들의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하는 선교사들의 모습은 조선인들의 생각을 변화시켰다.

장신대학교 임희국 교수는 “서양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에게 ‘인간 예수’라고 불릴 정도로 봉사와 섬김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전파했다”며 그들의 살신성인 선교의 모습을 전했다.

이후 언더우드는 조선선교가 무경험하며 무지하다는 것에 고민을 가졌다. 이에 한국에 들렀던 선교사 네비우스의 선교원리를 따라 자전, 자립, 자치의 선교원리를 조선 땅에 적용했다.

임 교수는 “언더우드를 비롯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선교 현장에서는 토착교회의 설립이 우선이고, 그 뒤를 이어 고아원이나 학교, 병원 등을 설립하는 단계를 밟기로 했다”며 “이는 교회 설립을 우선하는 가운데서 현지인을 존중하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먼저 주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난한 현지인들에게 복음이 먼저 전파되게 하는 것은 당시 제국주의 선교정책에서 벗어난 하나님 방식의 선교였다.

아펜젤러의 선교와 그 영향

서양 선교사들이 갓난아기들을 납치해 죽인다는 소문이 돌고, 콜레라로 하루에 수백 명이 죽어나갈 무렵 한국에서 사역하던 아펜젤러(1958~1902)는 180파운드였던 몸무게가 60파운드 이상 줄어들 정도로 정열적인 선교활동을 펼쳤다.

한동대학교 김낙환 박사는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운 교육가이자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한 목회자였고, 성경 번역가이자 출판가이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특히 배재학당은 국운이 기울던 때에 많은 지도자를 배출한 요람이었다. 아펜젤러는 이 학교를 조선 복음화의 원동력으로 삼고자 했으며, 교육은 복음 선교의 매개체일 뿐만 아니라 복음을 통한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김 박사는 “아펜젤러는 조선 정부도 아직 교육 규칙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을 때에 학당에 규칙을 만들었다”며 “영어를 비롯해 과학, 천문학, 지리, 야구, 축구까지 근대교육을 처음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도록 도왔으며, 협성회를 조직해 서구식 의회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성서번역 사업은 교회뿐만 아니라 일반사회를 계몽하는 역할도 감당했다. “아펜젤러야말로 한국의 교회, 교육,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선구자이자 개척자”라고 말한 김 박사는 “그의 제자들은 대부분은 국가의 기둥이 되고 독립을 위해 희생한 자랑스러운 일꾼들이 되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번 포럼을 주최한 한국기독교선교130주년대회위원회는 이번 포럼을 시작으로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조명사업을 통해 근대사를 정리하고, 한국교회의 미래를 열어가는 분기점을 마련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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