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강인춘
장죽섭(張竹燮 1888~1973)은 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로 호는 송암(松庵)이다. 1888년 4월 13일 평북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에서 출생하였다. 9세 때부터 한학을 수학하였고 양시보성(楊市普成)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년 일제의 한국 경제권 찬탈의 일환인 시장세에 반대한 백일세(百一稅)사건의 배후조정자로 당시 용천 민족주의자 송자현(宋子賢) 등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11년 석방되어 고향의 의성(義聖)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였으나 1912년 105인사건의 혐의자로 지목되어 만주로 피신, 봉천 장춘 하얼빈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유랑생활을 하였다.

1920년 남감리교 시베리아주재 선교사 정재덕(鄭在德) 목사의 전도를 받고 만주·시베리아연회에서 램버드(W. R. Lambuth) 감독으로부터 전도인으로 임명되었다. 1926년 하얼빈에서 열린 만주·시베리아연회에서 에인스워드(W. N. Ainsworth) 감독으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두도구교회에 파송되었다. 1928년 연길시교회, 1935년 도문(圖門)교회, 1937년 장춘교회 등에서 시무하였으며 1940년 북경(北京)에서 조선기독교회를 설립하였다. 당시에 교민회 회장을 겸임하면서 교민들을 보살폈으며 1945년 해방을 맞아 교민들을 귀국시키는 일을 맡아 크게 힘썼다. 특별히 한국인 교역자들을 귀국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장죽섭 목사 자신은 귀국하지 못하고 수많은 고초를 당하였고 조선기독교회는 폐쇄되었다. 그 후 1970년 중공에서 귀국하였으며 주안에 있는 감리교원로원에 거주하다가 1973년 4월 11일 별세하였다. (기독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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