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스, 장로교회 세우다

‘하나님 절대주권’ 영역 확대·발전

칼빈 장로회 정치체계서 큰 영향 … 민주적 장로제도 마련

2014년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 존 낙스(John Knox) 탄생 400주년이 되는 해다. 개혁교회에서 기억해야 할 종교개혁가가 많지만, 장로교회에 낙스는 보다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제네바에서 칼빈에게 개혁주의를 배운 낙스는 1561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를 조직하며, 세계 장로교회를 태동시킨 인물이기 때문이다. 낙스 탄생 400주년을 맞아 낙스의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장로교회 태동의 의미를 고찰하고, 낙스를 통해 오늘의 한국 장로교회를 점검하는 연속기획을 3회에 걸쳐 진행한다. <편집자주>

존 낙스의 출생연도는 이견이 있다. 1503~4년에 출생했다는 주장부터 1515년이라는 의견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학자 플레밍이 연구한 결과에 따라 현재 1514년 출생을 정설로 받고 있다. 출생연도까지 이견이 있을 정도로 낙스의 초기 생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에딘버러 인근 헤딩톤에서 태어나 성안드류스대학을 졸업하고, 20세가 되던 1535년경 성직자로 서품을 받았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언제 회심을 하고 프로테스탄트가 됐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위샤르트와 칼빈을 만나다

▲ 최근 <개혁신학의 전통> (그리심)을 출판한 서요한 교수가 낙스의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개혁신학의 전통>은 한국교회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개혁신학을 인물사상사로 엮어 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가로 존 낙스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인물은 위샤르트와 칼빈이다. 1545년경 위샤르트를 만난 낙스는 칼의 차고 위샤르트를 경호하며 따랐다. 하지만 위샤르트는 이듬해 체포되어 화형을 당하며 순교를 했다.

최근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개혁주의에 대한 책을 출간한 서요한 교수는 “위샤르트는 화형을 당하면서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위샤르트의 보디가드 역할을 했던 낙스는 그 순교의 모습을 현장에서 봤다. 이런 경험이 낙스를 타협없는 종교개혁가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후 낙스는 성안드류스에서 목회를 하며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로 이름을 알린다. 그러나 가톨릭을 지지하던 프랑스의 공격으로 낙스는 노예선에서 2년 동안 고초를 당했다. 영국왕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며 개혁의 기운이 감돌았으나, ‘피의 메리’로 불리는 메리 여왕이 즉위하며 낙스는 유럽으로 피신하게 됐다. 1554년 유럽 대륙으로 망명한 낙스는 그곳에서 쯔빙글리 불링거 베자 그리고 칼빈과 교제하며 종교개혁의 의지를 더욱 불태우게 된다.

무엇보다 제네바에서 칼빈과 교류한 것이 낙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서요한 교수는 “낙스는 칼빈의 제네바시 개혁에 도전을 받고 이때 정치체제로서 장로교에 대해 배우게 됐다. 또한 낙스는 칼빈에게 신학을 배우고, 제네바의 교육체계 등을 배웠다. 나중에 스코틀랜드 교회에 적용하게 될 신앙고백서도 이때 칼빈에게 전수받았다”고 밝혔다.

장로교회를 세우다

낙스는 1559년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지만 가톨릭 정책을 강요하는 프랑스의 공격에 직면했다. 개혁의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낙스는 사람들을 격려하며 영국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 1560년 프랑스와 휴전을 체결하게 된다. 서요한 교수는 가톨릭을 강요하는 메리여왕과 싸움에서 낙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개혁가들은 이미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전적주권’ 개념을 확립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낙스는 칼빈에게 큰 영향을 받았지만 세속권력에 대해 칼빈보다 더 강경한 입장이었다. 칼빈은 시민불복종의 개념을 갖고 있었지만 모든 권위를 위로부터 왔다는 말씀을 바탕으로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과정에서 프랑스(가톨릭) 메리여왕과 치열한 싸움을 펼치며,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의식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이전 종교개혁가들이 하나님의 주권 개념을 교리적 차원으로만 이해한 것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 분명해 진다. 낙스는 ‘하나님의 전적주권’ 개념을 교회를 넘어 정치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부분으로 확대해 ‘하나님의 주권’ 영역을 발전시킨 것이다.

프랑스와 휴전을 한 후, 낙스는 곧바로 스코틀랜드의 개혁을 단행했다. 의회에서 신앙고백서를 통과시키고 가톨릭과 완전한 결별을 이끌었다. 이듬해인 1561년 12월 낙스는 스코틀랜드 개혁가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를 조직하며, 세계 장로교회의 시작을 알렸다.

“낙스는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장로회 정치를 도입했다. 낙스와 스코틀랜드 교회가 민주적인 장로회를 도입한 것은 다른 종교개혁가들보다 앞선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칼빈에게 장로회 정치체계를 배운 낙스는 스코틀랜드에 성도들이 스스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적인 장로제도를 마련하면서 개혁교회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기고:서요한 교수(총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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