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강인춘
서울에서 일본 군인들이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을 집단 구타한 사건이다. 1919년 3월 6일 만세시위에 참가한 기독교인들을 체포하여 일본인 교회에 감금한 후 십자가를 만들어 그곳에 묶고 태형을 가한 사건이다. 일본 경찰은 그들의 강압적인 탄압정책을 보여줌으로써 만세시위의 열기를 누그러뜨리려 하였으나 오히려 이를 목격하고 격분한 군중은 만세의 열기를 더했고 동아연초공사(東亞煙草公司) 및 종로시가의 상점 등이 파업(罷業), 파시(罷市)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상해로 망명한 김병조(金秉祚) 목사는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 1920년)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시일(是日)에 경성독립운동이 계속하야 시위운동을 대행(大行)하니 적군이 다수 옹지(擁至)하야 남녀교인을 포박(捕縛)하야 일본인의 독립교회당으로 영거(領去)하여다가 무수한 십자가를 제조하야 남녀를 기상(其上)에 박현(縛懸)하고 적병(敵兵)이 전후 나열(羅列)하야 태90도식(笞九十度式)을 맹타(猛打)할새 관광(觀光)하는 자 수천에 지(至)하더라.”

이 사건은 제암리교회 방화사건, 강서교회 학살사건, 정주교회 학살사건, 강계교회 학살사건, 위원교회 학살사건, 간도 교인 학살사건, 정주 오산학교 피소사건 등과 함께 기독교도가 직접 당한 일제 만행의 하나였다. (기독백과) 일제 36년간 기독교도들은 인동초(忍冬草)와 같이 모진 고통을 감내(堪耐)하며 그 숱한 형극(荊棘)의 길을 걸어왔다. 그것이 신(信)과 의(義)의 길이요 애국(愛國)의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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