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에 대해 상해로 망명한 김병조(金秉祚) 목사는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 1920년)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시일(是日)에 경성독립운동이 계속하야 시위운동을 대행(大行)하니 적군이 다수 옹지(擁至)하야 남녀교인을 포박(捕縛)하야 일본인의 독립교회당으로 영거(領去)하여다가 무수한 십자가를 제조하야 남녀를 기상(其上)에 박현(縛懸)하고 적병(敵兵)이 전후 나열(羅列)하야 태90도식(笞九十度式)을 맹타(猛打)할새 관광(觀光)하는 자 수천에 지(至)하더라.”
이 사건은 제암리교회 방화사건, 강서교회 학살사건, 정주교회 학살사건, 강계교회 학살사건, 위원교회 학살사건, 간도 교인 학살사건, 정주 오산학교 피소사건 등과 함께 기독교도가 직접 당한 일제 만행의 하나였다. (기독백과) 일제 36년간 기독교도들은 인동초(忍冬草)와 같이 모진 고통을 감내(堪耐)하며 그 숱한 형극(荊棘)의 길을 걸어왔다. 그것이 신(信)과 의(義)의 길이요 애국(愛國)의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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